작품 발표작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넷) 돌아오지 않는 강/(수필) 월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4. 6. 23. 15:21

연작 수필 7부작 고향(故鄕)의 향수(鄕愁)를 찾아서 (넷)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람은 누구나 치매환자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잦다. 지난 과거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할 수 없음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법, 어제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 없는 내일이 있을 수 없듯이 과거 없는 미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데도 고사(苦思)하고 갖은 핑계와 구실을 다 동원하여 지난 일들을 잊으려 애를 쓴다. 더욱이 지난 과거가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신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까지도 애써 감추려 한다. 그러나 반대로 비록 지금은 가난한 살림살이에 별 볼 일 없는 직위에 있지만, 지나간 과거엔 부유한 형편에 호의호식하며 고생을 몰랐던 사람일수록 지난 과거를 잊지 않고 위도 하나뿐인 사람인 주제에 위를 네 개나 지닌 소를 닮으려 자주 되새김질한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이기적이고 간사스럽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대게 사람은 열 개중 아홉을 주면 하나 남은 것마저 달라고 손을 내민다. 반면에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난 과거를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열 개중 하나만 주어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과거 속에 몸서리치는 아픔이 있다던가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한순간 생각 없이 지우고 싶은 채 아물지 않은 과거 속 상처가 있는데 그 상처에 얽매여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었어는 안될 것이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지난 과거 속의 상처입은 자신의 모습마저 가슴을 열어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람은 추억 속 향수를 성화시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피곤함에 지쳐 눕고 싶을 때 아무런 계산 없이 온 마음을 다 내어주는 고향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영혼으로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향에 향한 향수나 어린 시절을 향한 추억의 향수를 생애 마지막 날까지 되새김질할 수 있는 영혼으로 머물고 싶다. 위를 네 개나 지닌 소가 아니니 소화불량에 걸릴지라도…

 

 삭막한 이 시대에 동고동락하여 살면서 추억 쌓기를 하며 생활했던 유년시절의 향수를 찾아 내디딘 네 번째 발걸음 언저리에 서성이는 첫 번째 향수는 내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다. 생각과 물질이 범람하는 이 시대를 사는 아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시대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그 시절 아이들은 그토록 유치하게 놀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돈을 가지고도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터라 동네 한적한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폐기와 장을 둥글고 잘 굴러가게 다듬어 기와 따먹기를 즐겨 하였다. 철도원들의 사택이었던 연산동 철도관사는 적산가옥으로 제다 기와지붕이었다. 기왓장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탓에 몇 년에 걸쳐 기왓장 교체를 해야 했으므로 아이들이 폐기와 장을 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폐기와 장을 큰 돌멩이나 망치로 적당한 크기로 깨서 둥글고 잘 구를 수 있게 고르는 것이 기왓장 따먹기의 승패가 달려있었다. 또래 친구들은 돌멩이로 힘들게 기왓장을 다듬고 있을 때 우리 형제는 갖가지 기술을 지닌 아버지를 두었던 덕분에 아버지 연장통에서 몰래 꺼내온 망치로 손쉽게 기와 구슬을 만들고 가다듬었다. 욕심이 별로 없었던 형님과 승리욕이 강해 다른 아이들에게 지기를 싫어했던 내가 한 조가 되니 만사가 형통했었다. 때로는 모든 면에 싫증을 잘 내며 끈기없이 기와 구슬 따먹기에 임하는 형님과 아무 곳에도 사용할 수 없는 기와 구슬이었지만, 단 한 개라도 따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는 어긋난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렸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 승자는 우리 형제들 것이었다. 그날은 조금 쌀쌀한 늦가을이었는데 동네 악동 몇 명이 우리 형제가 가진 기와 구슬이 탐이 났던지 유엔군도 다국적군도 아니면서 연합하여 찾아왔었다. 우리 집 작은 텃밭이 있던 창문 밑에서 기와 구슬 따먹기가 시작되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던 악동들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몹시 배가 고파 호구지책으로 어머니께서 김장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심어놓으신 무를 통째로 뽑아 묻어있던 흙을 툴툴 털어버리고 이로 무 껍질을 대충 벗겨 내고 베어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랬는데 여태 살면서 먹어본 무맛 중에 그렇게 달고 시원했던 무는 먹어보지 못했다. 조선무라 하여 약간 맵고 알싸한 늦가을 무맛이 입속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 천둥 같은 호령이 아이들의 게임판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 적당히 그럴 만한 것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빼먹었던 무는 우리 가족이 한 해 겨울 먹을 무김치를 능히 보조해줄 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생 무 몇 개 뽑아먹은 죄로 공동책임을 지고 저녁밥도 먹지 못한 채 밤새 꼬르륵거리는 뱃속을 달래느라 혼쭐이 나갔었다. 자는 척했지만, 안쓰러운 어머니 손길이 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훑어 올려주심을 느꼈다. 모정이니 능히 그랬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느껴볼 수 없는 정의 향수가 못내 그립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변하는 건 대자연이다. 개발과 번영이라는 탈을 쓰고 무분별하게 추는 미치광이들의 탈춤은 언제나 끝을 맺으려나 다만, 피를 흘리지 않을 뿐이지 국토개발이라는 핑계로 허리가 잘려 나아가고 옥수가 흐르던 강에 똥물이 흐른 사이 향기 그윽한 향수가 흘렀던 내 추억 속 냇가도 메말라 마냥 신이나 헤엄치던 버들치도 산천어도 고향을 잃은 채 구정물 가득 찬 이름 모를 어느 강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굴착기 굉음에 통째 둥지를 잃은 물닭과 물꿩은 지금 이 순간에도 타향살이 서러움에 울고 있겠지. 잃어버린 내 추억 속 향수처럼 지금도 열두 살 아이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흐르는 향수가 있다. 물때를 잘 알고 계셨던 아버지께선 퇴근 후 달이 밝고 밀물 가장 썰물과의 차이가 가장 작은 조금이 되면 '좌도수군 본영이 동평현(東平縣)의 북쪽 7리 부산포에 있다'고 하는 데서 유래되어 이름 붙여진 수영강으로 나가 밝은 달빛을 보고 강둑으로 올라오는 민물 게를 잡아오시곤 하였는데 물이 맑고 주위 환경이 얼마나 깨끗했던지 두세 시간 게를 잡으면 큰 자루로 한두 자루는 거뜬했다. 잡아온 민물 게로 이웃사촌 몇 집이 게장을 담가 입맛을 돋우기도 했었다. 수영강에는 뱀장어·은어·황어·버들치·피라미·왜몰개·붕어·자가사리 등이 서식하고 있었으나, 극심한 하천오염 탓에 생태계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어 떠나간 민물고기 민물 게는 언제나 돌아올는지 옛 전설처럼 멀어진 실화이지만 수영강과 같은 줄기인 온천천만 하여도 1급수에 생존하는 각종 민물 생명체들이 둥지를 틀어 아름다운 몸짓을 아끼지 않았다던데 지금은 강둑만 거닐어도 구린내 진동하는 똥물이 텃세를 부리며 흐르고 있더이다. 지금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 내 추억의 향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