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옛정

松竹/김철이 2013. 3. 19. 09:00

옛정

 

 이 세상 인간사에서 가장 무섭고도 더러운 것이 정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요즈음 들어 기억 속 저 멀리 흘러간 인연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시시때때로 가슴 시리게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그들 중에는 이미 오래전 하늘나라 사람이 되어계신 부모님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아무리 평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다 하더라도 이제는 분명히 끊어야 할 인연이고 끊어야 할 정이건만, 왜 여태껏 이미 멀어진 옛정에 얽매여 잊지 못하는 것인지… 아버님은 지금 우리 부부가 사는 집에 한 번도 다녀가시지 못하셨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머니께선 틈이 있으실 때나 작은아들과 며느리가 보고 싶을 때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다녀가셨던 탓인지 몰라도, 분명히 아버님과 어머님께선 벌써 돌아가신지 6년여 전에 이 세상과 이별을 하셨고 또한,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 수 없는 정과도 이별하셨는데, 요즈음에 와서도 시시때때로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내게 쏟아주셨던 어머님의 소나기 옛정이 떠오르곤 한다. 이건 아니라 하면서도 외출을 했을 땐 어머니께서 집에 오시어 문이 잠겨서 밖에서 기다리시면 어떡하나 하는 착각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 문이 흔들릴 때면 어머니께서 오시어 문을 잡고 흔드시는 환청도 듣곤 하지만, 나 자신이 이어질 수 없는 옛정에 얽매여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면 그 또한 부모님께 대한 불효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즈음에서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께 이 못난 자식이지만 나름대로 제 몫 하면서 잘살고 있으니, 정녕 이어갈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옛정에 얽매여 가슴 아파하시지 말고, 이승에 계실 때 저 때문에 고생하신 기억 다 잊고 지치지 않는 날개 달아 넓디넓은 하늘나라 여행 다니시라 당부 말씀드리고 싶지만, 솔직히 부모님의 그리운 옛정을 정녕 끊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상 모든 자식이 다 마찬가지겠으나, 나는 유별나게 부모님께서 본성 속에 심어주셨던 아름답고 가슴 시린 추억이 많다. 어찌 종이 몇 바닥에다 부모님과 관련된 추억 보따리를 다 풀어놓을 수 있겠느냐만, 한 작가의 글의 고향이 되었던 옛 추억의 이야기 주머니의 끈을 풀어놓아 보기로 한다. 지금도 잊히지 않고 기억이 생생한데 강태공 경력 60년이 훨씬 넘는 아버지 젊은 시절엔 나라 안 모든 바다가 오염이 되질 않아 아버지께서 낚시질 가셨다 하면 결코 빈 망태로 돌아오신 일이 없었다. 하루는 경남 서생으로 낚시질을 가셨던 아버지께서 오후 다섯 시경 다른 날보다 유달리 일찍 귀가하셨는데 왠지 망태를 어깨에 멘 채 힘겹게 걸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멀리서 보신 어머니 “너거 아버지 오늘은 허탕치셨나 보데이 저래 걸음 옮기시기가 어려우신 걸 보이까네” 웬걸 어머니 말씀이 땅에 떨어져 흙먼지 한 점 묻기도 전에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일러주었다. 아버지의 고기 망태는 빈 망태가 아니라 그날 따라 고기들이 입질이 잦아 낚은 고기를 망태에 담다 다 담지 못한 나머지 함께 낚시를 갔던 친구분들에게 몇 수씩 나누어 주고도 망태를 채우다 못해 망태에 들어 있던 갖은 낚시도구는 망태 보조역활을 해주던 보자기에 옮겨 싸고 망태 속엔 낚은 고기들로 가득 채워 힘들게 메고 거제동 열차 역에서부터 연산동 집을 향해 걸어오시는 길이었다. 그 당시 그 시절엔 현재 부산 제일의 시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연산동에도 수도공사가 되어 있는 집이 단 한 집이 없어 동네 주민의 식수로 공동우물을 이용해야 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낚아오신 고기들을 공동우물 시멘트 바닥에 쏟아놓으니 이 많은 고기를 어떻게 낚싯줄로 다 낚아올렸을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들었고 평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아주머니 이십여 분 불러내어 부모님 두 분의 손길만으론 그 많은 고기를 손질하기 어려우니 다 함께 손질하고 회를 쳐서 여러 가족이 함께 나눠 먹자고 하니 동네 어른들 어떻게 이 많은 고기를 낚싯대 하나에 의지해서 손으로 다 건져 올렸느냐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이십여 가구의 가족들은 생선회로 포식했었다. 그 시절 그 일은 온 동네 전설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 입소문이 동해남부선 열차 안에까지 번져나가 동해남부선 열차를 이용했던 낚시꾼들 사이에 아버지는 낚시영웅이 되셨고 낚시를 배우려는 강태공들 탓에 매주 토요일만 되면 그리 넓지 않은 우리 집 안방은 낚시교실로 둔갑하여 법석거렸다.

 

 사람 가슴에 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을 쌓는 모습이 사람마다 다르고 모양과 색깔도 다른 법이다. 내 부모라서가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정을 쌓는 모습만은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다. 부모님 젊은 시절 정을 쌓는 모습은 헌신적이었다. 남들처럼 돈이 많아 금품으로 쌓을 수 없었던 부모님은 이웃에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솔선수범(率先垂範) 당신들 육신조차 아낄 줄도 모른 채 헌신적으로 봉사했었다. 아버지께선 이웃에 길사(吉事)가 생길 때는 물론 흉사(凶事)가 있을 때마다 마치 당신 일들처럼 낮에는 직장일 퇴근하시면 이웃의 길흉사에 매달리셨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에 걸맞게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 못지않게 이웃의 길흉사에 발벗고나서 헌신적인 봉사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내 부모님께서 이웃에 정을 쌓던 몇 가지 모습을 소개하자면 어머니께선 공식적인 배움을 받은 바는 없지만, 옛날 사람이라는 표현에 걸맞지 않게 다양한 지식을 뇌리에 쌓고 있었다. 의료혜택을 골고루 주지 못했던 그 시절 어머니는 자청하여 동네 산파(産婆)를 도맡아 해산달(解産)이 되었으나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해 산부인과를 찾지 못하는 서민층 산모들을 돌보아주고 어머니 손수 받아낸 아기만 하여도 이십여 명이 넘는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동네 결혼식이 있을 땐 잔치음식은 물론 신랑 신부가 입을 혼례용 옷들도 손수 지어내셨고 흉사가 있을 땐 누구라도 꺼리고 심지어 자기 자녀의 시신이나 제 부모 시신조차 손수 만지기 꺼리는 판국에 자청하여 시신을 깨끗이 닦아주는가 하면 마지막 가는 혼백을 잘 가라 배웅하길 수십 차례 생의 마지막 날 손수 배웅하셨던 영혼들 모두 다 만나셨는지… 이 밖에도 궂은일이면 먼저 발벗고나서다 부족하여 힘들고 어려운 이웃이 있을 땐 눈뜨고 그냥은 못 지나쳤기에 당신이 가진 돈이건 다른 이의 돈을 빌려 꾸어준 돈이건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했던 돈의 액수를 헤아린다면 어림짐작으로도 소홀치 않을 게다. 어머니께선 입버릇처럼 늘 말씀하셨다. 매를 맞은 놈이나 돈을 떼인 놈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지만, 매를 때린 놈이나 돈을 떼먹은 놈은 평생 발복(發福)하지 못하고 오금을 저리며 하룻밤도 단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해서 모르긴 해도 하늘나라에 계신 울 어매 남부럽지 않게 부자로 사실 거라 믿는다. 이 시대에 사는 누구라도 들으면 미친 짓 많이도 했다며 코웃음과 함께 비웃겠지만 난, 당신들이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람의 정은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은 신정(新情)보다 구정(舊情)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자신의 이익만 계산하다 보면 조롱박만 한 정도 못 쌓고 간다시며 가슴과 가슴에 정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던 내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부모(父母)와 자식(子息)의 연으로 낳아주신 은혜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