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시 이도1동 '금메달식당'
소렌토에서 카프리로 간 까닭은?
몇 해 전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소렌토에서 예정에도 없는 카프리 섬에 들렀던 것은 신생 제정 로마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초기 황제 티베리우스의 흔적이 궁금해서였지만 내심 기회가 되면 해안가에서 회나 한 접시 먹어야겠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프리 섬의 선착장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횟집이 한 군데도 없고 엉뚱하게 옷집과 무슨 잡화상 같은 곳만 보였다. 그제야 여기가 내 나라 땅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우리나라 해안도시에 가면 포구가 있고 포구를 중심으로 횟집들이 도열해있다. 너무 당연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식당들이 모두 최상의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중에 어떤 집은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다. 문제는 외지인으로서 그런 집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쑥 들어가기가 망설여진다.
바로 이런 고민을 해결해주는 곳이 '회 쳐주는 곳'이다. 어시장에서 해산물을 직접 골라 가지고 가면 그것을 회나 탕으로 만들어주는 식당이다. 으레 항구도시의 뒷골목이나 시장 안쪽에 자리 잡은 이런 집에서는 푸짐한 덧거리(쯔케다시)나 세밀한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기호나 구미에 맞는 어종과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어 좋다. 또 그 도시의 꾸미지 않은 맨얼굴을 접할 수 있어 여행객에게는 오히려 매력적인 경험이 된다.
재료만 사오면 회, 구이, 탕, 무침, 뭐든지 척척
제주시 동문재래시장 안에 있는 '금메달식당'도 횟감을 사서 가지고 가면 회를 쳐주는 식당이다. 이 집은 회뿐 아니라 탕, 구이, 조림, 무침 등 재료를 사서 가지고 가면 손님이 원하는 형태대로 요리를 만들어주는 맞춤형 전문식당이다. 동문재래시장은 전형적인 우리네 재래시장으로, 깔끔하게 시설 현대화 작업을 하여 재래시장 본래의 투박함과 흥성거림은 줄었지만 제주 특산 생선과 해산물은 아주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 많은 종류의 해산물과 생선 가짓수가 이 집 메뉴의 가짓수인 셈이다.
이 식당의 주인장 이윤선(57)씨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맞춤형 전문식당을 표방한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어떤 손님이 이 식당에 생선을 사가지고 와서 탕으로 끓여달라고 했다. 손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 얼떨결에 약간의 수고비만 받고 그렇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 손님은 무척 흡족해하였다. 이 일이 맞춤형 식당의 효시가 되었다. 지금은 1인당 5,000~6,000원만 내면 손님이 가져온 생선과 해산물로 손님이 원하는 대로 조리를 해서 기본 밑반찬과 함께 내어간다. 손님이 추가로 먹는 공기밥(1,000원)과 술값(소주, 3,000원)은 각자 먹은 만큼 별도로 내면 된다.
이 집 단골손님들은 전국적으로 포진하고 있다. 전복구이 좋아하는 대구 이불 가게 주인장, 해물탕만 주문하는 부산 아저씨, 각종 생선회만 좋아하는 원주 대학교수, 전복 된장 샤브샤브에 열광하는 창원 일가족 등 다양하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제주에 올 때마다 반드시 이 집에 들러 제주의 맛을 확인한다고. 찾아가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사람이나 만나면 반갑기가 매일반. 아무래도 식성을 훤히 아는 단골에겐 주인 입장에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단골들도 음식 맛과 인정 맛에 끌려 해마다 다시 찾게 되는 모양이다.
최고의 인기 메뉴는 '전복 된장 샤브샤브'
이 집을 찾는 고객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메뉴는 전복 된장 샤브샤브. 5~6년 전에 주인장 이씨가 연포탕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메뉴다. 사실 들어가는 재료는 전복을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 그런데 참 구수하고 시원하다. 단지 쌀뜨물을 받아서 국물로 쓴다는 것 밖에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끓인다. 국물이 끓으면 여기에 팽이버섯과 배추와 부추를 넣고 손질한 전복을 넣는다. 이게 조리의 전부다. 처음엔 조금 실망했다. ‘저렇게 간단한 음식이 무슨 인기 메뉴일까’ 하고 의구심이 생겼다.
그러나 국물이 끓고 익은 채소와 전복을 건져먹는 순간, 잠깐 의구심을 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구수함이 풍부한 된장 국물과 함께 먹는 배추잎사귀와 쫄깃한 전복이 자꾸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배가 불러와 뇌에서는 그만 먹자고 하는데 손과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
뭔가 비싼 재료를 여러 가지 잔뜩 넣고 희귀한 조미료를 뿌려대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미니멀리즘은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담백하면서도 구수한 맛과 감칠맛의 폭이 무척 넓은 전복 샤브샤브는 또 다른 미니멀리즘 예술의 정수였다. 육지에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단골들이 전복 샤브샤브를 먹으러 우리 식당부터 온다는 주인장 이씨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리하는 동안 '잠깐 시장 구경' 재미도 쏠쏠
이 집을 이용하면 수족관에서 오래 머물지 않은 싱싱한 동문시장의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자신의 구미에 맞는 조리형태로 골고루 맛보는 이점이 있다. 싱싱한 전복 3~4만원어치 정도만 사서 이 식당에 부탁하면 2~3명이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 정도 음식을 일반 식당에서 사먹으려면 얼추 따져보아도 최소한 10만 원 정도는 들여야 할 것 같다. ‘맞춤형 식당’이 손님입장에서는 간편하지만 식당 주인 이씨에게는 이 점이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한꺼번에 여러 팀이 몰려와서 탕 끓여라, 구워서 내와라, 회 쳐라 하면 정신이 없을 때가 많다. 미리 준비한 재료로 계획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데, 그때그때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불쑥불쑥 생선과 해산물을 들고 찾아오기 때문에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오래 잊지 않고 찾아준 고객이나 맘에 드는 손님에게는 전복의 내장으로 젓을 담근 개우젓을 아껴두었다가 살짝 맛보라며 꺼내주기도 한다. 밥에 비벼먹는 개우젓 맛도 자꾸 당긴다.
알고 보니 이곳 동문시장 안에서 해산물을 파는 '사장님'들도 이 집을 애용하고 있었다. 경남 통영이 친정인 주인장 이씨에게 이웃 친구로 보이는 생선집 여주인은 "이 통영년은 아무거나 들이대도 못 하는 게 없다"며 웃는다.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를 했지만 시장은 시장이다. 푸짐한 이바구가 있고, 흥정이 있고 인정이 있다. 물건을 사서 조리를 맡기고 남는시간에 잠깐 시장구경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생전 처음 보는 생선이나 희한하게 생긴 해산물도 언뜻언뜻 눈에 뜨인다.
누군가 외국에 나가 식당을 차리고 싶다면 카프리 섬 선착장에 한국인과 동양인을 상대로 하는 횟집을 내보라고 권하고 싶다.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이 없다면 로마의 유적과 코발트 색 바다와 투명한 지중해 햇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처럼 회 생각이 간절해 그곳에 오는 관광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장담할 순 없지만 아직도 그곳에 횟집이 없다면 대박을 칠 게 분명하다. 카프리 섬이나 금강산만이 아니다. 제주비경도 식후경이다. 아름다운 제주에 푸짐한 생선과 해산물이 없었다면 제주여행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출처: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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