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요리

발로 뛰어 발굴한 숨은 맛집 (32) 부산시 동구 초량1동 '삼생원'

松竹/김철이 2011. 7. 13. 07:44

발로 뛰어 발굴한 숨은 맛집 (32) 부산시 동구 초량1동 '삼생원'

 

  • 월간외식경영 글·이정훈 기자 사진·변귀섭 기자

 

 

대륙의 끝에서 만난 정감 어린 중화 분식

유라시아 대륙의 맨 끝, 부산에 서면 가끔 막막한 느낌이 들곤 한다. 그곳은 더 이상 갈 수 있는 여분의 땅이 없는 곳, 다시 되돌아서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부산에 가서 볼 일을 다 보고 발길을 돌려 올라올 때면 왠지 늘 알 수 없는 미련이 남는다. 바로 올라오기가 뭣해 여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허락되면 습관처럼 부산역전 주변 시장과 골목을 배회한다. 역전 건너편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화 분식점 <삼생원>도 그렇게 만났다.

3대가 정성들인 만두, 유명인들도 즐겨 찾아


 

서울행 열차시각을 느긋하게 미뤄놓고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만두’라는 두 글자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만두 8개가 접시에 얌전히 담겨 나왔다. 수수하지만 왜소하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은 모양새가 먹지 않아도 든든했다.

만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출출했던 이방인의 입맛에 <삼생원>의 만두(5000원)는 기대치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 일회용 나무도시락에 포장해서 집에 와 먹었던 고기만두 생각이 났다.만두 속에 뭘 넣었기에 이렇게 맛있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장 곡씨가 돼지고기 간 것과 무밖에 넣은 것이 없다며 빙그레 웃는다. 그러나 곡씨와 시어머니 이주화(84) 씨, 그리고 그녀의 딸 마안륜(馬安倫, 23) 씨 3대가 한 땀 한 땀 손으로 직접 빚은 만두는 수제만두의 진수를 보여준다. 만두피가 그리 얇은 것도 아니고 주인장의 말대로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지만 씹을 때마다 메이커 만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사람의 손맛이 그대로 입 안에 전달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집 만두 단골들이 많고 다양하다. 가끔 봉사단체들이 부산교도소에 음식 봉사를 하는데, 수인들을 대상으로 원하는 메뉴를 고르라고 하면 피자나 치킨을 제치고 이 집의 만두를 선택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부산의 유명 디자이너 배용 씨,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도 이 집 만두 단골손님이다. 전국에서 택배로 주문하는 손님들도 있고, 미국이나 중국 등 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만두를 먹으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편, 작곡가 고 길옥윤 씨는 지금은 만들지 않는 이 집 호떡을 부산에 올 적마다 사먹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아주 먼 곳에서 일부러 어떤 아주머니가 만두를 사러 왔다. 몇 번을 ‘여기가 부산 삼생원이 맞느냐’고 묻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의 사연인즉, 남편이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는 와중에 ‘그 집 만두를 꼭 한 번 먹고 싶으니 가서 좀 구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콩국과자 등 입맛 돋우는 다양한 중화 분식 메뉴


 

이 집에는 중국식 만두 외에도 중화풍의 분식 메뉴가 몇 가지 더 있다. 콩국과 함께 먹는 콩국과자(요우티아우, 3500원)는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간편하게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는 메뉴라고 한다. 기름에 튀겨낸 길쭉한 과자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 이를 콩국 물에 찍어서 먹는다. 깊은 고소한 맛이 나는데 간이 밴 음식에 익숙한 사람은 싱겁게 느낄 수도 있다. 콩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원액을 한 번 걸러내고 비지를 버려 국물이 아주 맑은 편이다. 고소한 콩의 풍미는 우리의 콩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콩국처럼 차갑게 먹으니 역시 시원하다.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어서 먹는다.

식빵(가우빙, 1200원)은 말 그대로 중국식 식빵이다. 밀가루를 한 번 익혀 기름에 잰 것을 소로 넣고 성형을 하여 구워낸다. 그냥 먹어도 되지만 그야말로 식빵처럼 내부에 반찬이나 샐러드, 나물 등을 넣어서 먹기도 한다. 풍선처럼 내부가 텅 빈 공갈빵(1000원)과 꽈배기(1200원)는 중 장년층들에게는 추억의 주전부리 감이었다.

만들 때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것은 팥빵(900원)이다. 아직도 팥을 삶는 일은 이주화 할머니의 주도하에 하고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에 기무라 야스베에가 처음 만든 단팥빵이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당시 화교들이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고, 화교였던 이주화 씨도 그 제법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팥 향과 달콤한 맛에서 ‘공장 단팥빵’과는 또 다른 수제 팥빵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팥을 삶아서 팥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아 가게에서 팥빵이 안 보일 때가 많다.

신산스러웠을 선조들 삶 끝에 반전의 기록 시작


 

<삼생원>이 언제 생겼는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60~70년은 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지금 이 집의 주인장인 곡여병(53) 씨가 1985년 결혼할 당시에는 남편과 시숙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게에 나와서 일을 한 것은 20년 정도에 불과하다.

곡씨의 시어머니인 이씨의 말에 따르면 처음 시집왔을 때 남편(곡씨의 시아버지)과 시아버지가 서울 영등포에서 호떡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 상호는 ‘일생원(一生園)’이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민 대열에 합류하여 부산까지 떠밀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팔순의 이씨도 영등포에서 운영했던 호떡집이 규모가 무척 컸다는 점은 기억하지만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단지 시집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호떡집을 했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다.

주인장 곡씨는 연로한 시어머니와 함께 3년 전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다. 관절 수술을 받아 몸도 신통치 않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엔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틈나는 대로 가게 일을 돕는 천금 같은 딸 세 자매가 있기 때문이다.

큰딸은 대만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역시 대만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느라 유학 가 있는 둘째 딸 마안륜 씨가 방학을 이용, 귀국하여 요즘 엄마를 돕고 있다. 고교 2년생인 막내딸은 중 3때부터 가장 힘들다는 콩국과자 반죽하기를 식구들 가운데 제일 능숙하게 해낸다. ‘아빠가 안 계시니 이제 그 일은 내일’이라며 생전에 아빠가 하던 일을 본인이 자청해서 시작했다. 바쁠 때는 카운터 고정 담당이기도 하다. 성격이 활달하고 밝은 세 딸들의 애정표현 때문에 곡씨는 외롭고 힘들 틈이 없어 보인다.
북국에서 남하하여 최소한 60~70년 동안 이국땅에서 신산스럽게 떠돌았던 선조들 삶을 이어받은 세 자매. 부산에서 더 이상 그들이 떠밀려갈 남쪽 땅도 없지만 떠밀려갈 이유도 없다. 이제부터 그녀들이 써나갈 역사는 새로운 반전으로 채워질 것이다. 신나게 일하고 사랑하며 즐겁게 사는 그녀들이 빚어낸 만두, 맛이 좋을 수밖에…. 051)468-4881

 

 

 

출처: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