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부활 제5주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뵙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부활체험을 통해서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함께하며 키워온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 제5주간을 지내는 오늘 말씀은 고별담화의 일부를 전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이시지만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는 주님의 말씀 (13장) 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14, 1) 하며 제자들에게 충실한 믿음을 당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굳건한 신뢰와 내적 평화를 줄 수 있으며, 부활하여 오실 예수님을 알아뵐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에 거처할 곳이 많다 …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 같이 있게 하겠다.” 는 약속으로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2 – 3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곳이 곧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일까요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4절) 고 확신하는 예수님께 토마스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 (5ㄴ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6절) 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길을 알 때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길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 이라고 하시며 그런 만큼 “이제부터 그분을 아는 것이며 이미 그분을 뵌 것” (7절) 이라고, 길과 목적지가 하나임을 알려주십니다.
‘안다’ 는 것과 ‘본다’ 는 것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안다’ 는 것은 전인적인 만남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 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상호 내재적인 완전한 일치와 친교를 이루십니다. (10절) 또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 (11절)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10, 14 – 15 참조)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려주시고(1, 18; 12, 45; 14, 9 참조),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1, 17; 4, 23 – 24; 8, 31 – 32; 17, 3 참조),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14, 6)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한 것은 비단 그 시대의 제자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8절) 필립보의 요청 앞에 예수님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9절) 하시며 너무나 간절하게 믿음을 촉구하십니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10절),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1절; 5, 36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확고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믿음만이 예수님 안에서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볼 수 있게 하며, 길의 목적지인 ‘아버지’ 와 ‘아버지의 집’ 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14, 2. 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나를 믿는 사람” 은 “내가 하는 일” 과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 이라고 약속합니다. (12절) 예수님의 “일” 은 (11절)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아버지께 가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 안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더 큰 일’ 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맺어갈 믿음의 열매이며 (12, 32; 15, 5; 20, 21 – 23 참조), 그 일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일이 됩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활동하신다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 3; 마태 28, 20 참조)
묵상 (Meditatio)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14, 9ㄱ) 네, 예수님을 압니다.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이성과 지성으로만 알고 있다면, ‘안다’ 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그리고 그것을 참으로 ‘안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 토마스와 필립보 사도가 그 ‘길’ 을 모르니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한 것이 어찌 그들만의 나약한 믿음이겠습니까 ? 길을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까닭은 ‘길’ 에 서서 ‘진리’ 로 이끄는 당신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몰입된 탓은 아닌지요 ? ‘생명’ 으로 이끄는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참으로 이 아침에 고요로 떠오르는 주님의 얼굴을 뵈오며, ‘나’ 라는 우상을 치우고 싶습니다. 부활하시어 풋풋한 새 아침의 얼굴로 오시어 제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생명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을 알아뵙도록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기도 (Oratio)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당신의 길이, 만민에게 당신의 구원이 알려지게 하소서. (시편 67, 2 – 3)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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