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부활 제4주일 · 성소주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의 목자이신 주님만을 알아뵙고 희망하며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착한 목자’ 비유는 양들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는 이스라엘 직종 가운데 하나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맡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유목민은 안정된 한 장소에서만 가축을 돌보는 것이 아니기에 양 떼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목자의 권위와 직분을 부여받았습니다. (창세 37, 16; 1사무 17, 34 참조)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어떤 위험이나 재난을 만났을 때 양 떼를 버려두고 가는 일이 없으며, 이는 목자로서의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미풍을 배경으로 일찍이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 으로 표상해 왔습니다. (시편 77, 21; 이사 63, 11; 에제 34, 1 – 16 참조) 이렇듯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의 결속 관계를 목자와 양들 (요한 10, 1 – 5), 양들의 문 (7 – 10절), 착한 목자 (11 – 18절) 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문으로 들어가는 양들의 목자” 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도둑이나 강도” 를 구별합니다. (1 – 2절) 도둑이나 강도는 양들을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 이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10절) 오십니다. 이로써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극명하게 드러나기에,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기에 따라갑니다.” (3절)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절)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 는 일차적으로 ‘알아듣는 것’ 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만 알아도 그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안다’ 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전인적 신뢰와 온전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기 양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 있다 해도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모으고 이끄십니다. 또한 목자가 앞장서서 갈 때 양들이 그를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과 그 뜻을 이해하며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3 – 4절)
그 따름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추종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의 이차적 관계는 ‘추종 ’으로 이어집니다. ‘추종자’ 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접고 주님과 운명을 함께하며 가르침과 뜻을 따릅니다. 오직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것은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리 3, 10 – 11) 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9, 39; 10, 6 참조)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유일한 목자로서 구원의 통로인 “문” (루카 10, 7. 9) 이며,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 (14, 4 – 6) 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갈 때만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 (10, 9) 이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10절) 될 것입니다. 이는 양들이 생명의 목초를 얻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친히 선정하신 착한 목자로서 우리의 종말론적 구원자이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묵상 (Meditatio)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 3ㄴ) 제가 주님을 밝히 알고 목소리를 배워 익힐 때, 비로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알고 계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제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은 제가 찾아가서 만나는 문이 아니라 불러주실 때 이르는 문이셨습니다.
기도 (Oratio)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 1. 6)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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