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두레박

[군종] 당신은 누구십니까?

松竹/김철이 2011. 5. 7. 21:21

[군종] 당신은 누구십니까?/강은식 신부(부활 제3주일)

 

 

신학생 시절 서품을 준비하면서 장기 피정에 들어갔습니다. 하루 8시간의 묵상과 기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매일 1시간의 성체조배 시간이 있었는데, 현시된 성체를 바라보며 그 당시 제게는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질문만을 계속해서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다름 아닌 “예수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가 중심이 되는 신학교 생활을 해왔지만, 예수님은 제 안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물음표’로 자리하고 계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피정 기간은 흘러 어느 덧 20여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께 대한 나의 묵상은 ‘물음표’이신 분에서 ‘느낌표’이신 분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 생각의 대상이 아닌, 바로 마음으로 체험되고 존재하시는 분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체험은 당시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고 나중에 되돌아보니 내가 참 많이 웃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성체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참 우습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우매한 질문들을 쉽게 던지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의 생명의 입김이 녹아있는 이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도 자신들과 함께 걸으며 말씀을 나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하는 그들의 대답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말씀과 행동에서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라는 제자들의 대답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동기가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실천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셨지만, 그들이 바라보고 놀라워하며 추종한 것은 단지 여러 기적들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관점의 차이가 틀리니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그들에게 있어 허망한 무력감일 수밖에 없었고, 부활은 더더욱 믿기 어려운 사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걷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빵을 떼어 나눠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던 그 나눔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의 공생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아보고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우리 안에 심어진 자신만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이웃과 이 세상을 위해 실천할 때, 우리가 곧 예수님의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