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야참

松竹/김철이 2010. 2. 9. 18:10

공인으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아내는 요 며칠 전부터 사이트마다 나의 이름을 걸고 블로그를 꾸며 많은 이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밤낮을 모른 채 나의 문학 작품을 올리는 데에 온통 정신이 다 팔려 있다. 나로서는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내의 힘들고 고된 그 작업은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인 아내의 조급한 심정을 알 리가 없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은 100미터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운동화도 신지 않은 채 내일을 향해 다름질 친다.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한 아내의 작업은 끝이 보일 길 없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 일요일 새벽 2시 30분을 가리키는데 바로 뒷집 대문 쪽에서 오토바이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요란스레 나더니 어느 음식점 배달원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린다. "감사합니다." 어느 집 가족들이 늦은 시간까지 놀다 야참을 시켜 먹는듯싶다. 순간, 뱃속에서 "쪼르륵…." 하고 작은 굉음을 낸다. 속으로 "인마! 너도 염치가 좀 있어라…." 라며 꾸짖고 있을 때쯤 어느새 허락도 없이 입 밖으로 말이 뛰쳐나온 것이다. "누구 집에서 야참을 시켜 먹나 보지...?" 못들은 채 그냥 넘어가면 어디가 덧나는지 아내가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그래서 당신도 먹고 싶은 거에요?" 속마음과 달리 나도 모르는 사이 말이 헛놔오고 만다. "아니… 그저 그렇다는 거지 뭐.. 좀 더 솔직해지면 안 되는 것인지 누가 무서워 나 자신마저 속인단 말인가? 먹고 싶은 것을 어쩌라고, 배가 고픈 걸 어쩌라고,." 자고 일어나 눈만 뜨면 식사하는 시간만 제외하곤 꼬박 하루를 글 작업하는데 다 쓰느라 온종일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탓에 불과 몇 달 사이 체중이 많이 늘어 가끔 농담삼아 말하는 아내의 타박이 두려워 나의 마음마저 속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체중이 늘고 음식은 먹고 즐기라고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배가 고파 그 먹고 싶은 음식조차 마음 놓고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시절이 머지않은 기억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요즈음도 서민층 아이들은 별다름이 없다고 들어 알고 있지만, 그 시절 아이들은 어떤 음식이든 음식에 관한 욕심이 과하다 할 정도로 많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음식만 대하면 환장한 것처럼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들었고 그 탓에 급체하여 엄마들이 바늘로 아이들 손가락 등을 따서 피를 내는 모습들을 집집이 자주 접하던 풍경이었다. 사람이 음식을 외면하고는 살 수가 없겠지만, 음식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면 짐승이나 다를 것 있겠느냐며 음식에 대한 과대한 욕심은 부리지 말라고 늘 입버릇처럼 일러주셨던 어머님의 가르침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식에 대한 헛된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간혹 어머님께서 외출하고 계시지 않을 때 이웃에서 별식을 만들어 가져오는 경우엔 어머님께서 귀가하실 때까지 그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어머님께 보이고 어느 누가 가져왔더라는 말씀을 드린 후에야 그 음식을 삼 남매가 나누어 먹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먹는 음식 얘기를 하자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일화 몇 가지가 생각이 난다. 우리 삼 남매가 아주 어릴 적부터 몸이 몹시 편찮으셨던 어머님께선 식사는 물론 음식이란 이름만 붙어 있어도 외면하셨고 그런 어머님을 보다 못한 아버님께서 퇴근하실 때마다 별식을 사오셔서 어머님께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려 하셨는데 한 때는 양과점에서 판매하는 부드럽고 작은 빵류를 사다가 조금씩 드리려고 아버님 책상 서랍에다 넣어두시고 열쇠로 잠가놓으셨다. 그런데 이놈의 아들놈들이 어머님께 뭐 하나 사드려도 부족했던 판에 어머님께 드리려고 사놓은 간식을 빼먹지 못해 안달이 났고 어떤 방법으로 어머님의 간식을 꺼내 먹을까를 궁리하던 아들 두 놈은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잔머리를 짜낼 수 있었는지 아버님께서 열쇠로 굳게 잠가놓으셨던 책상 서랍 뒤로 들어가 책상 천정과 서랍 사이에 작은 틈 속으로 손을 넣어 꺼내먹곤 했었다. 또 한때는 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라 아이들의 군것질감조차 넉넉지 못했던 탓에 왜 그렇게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았던지 이웃에 시골에 외가를 둔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한층 더 철부지였다.

그 누나는 외가에서 보내준 고구마 빼대기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나누어 주며 먹곤 하였다. 고작 해야 고구마를 칼로 삐져 말려놓은 것인데 왜 그렇게도 그 빼대기가 먹고 싶었던지 그 고구마 빼대기가 너무 먹고 싶어 그 이웃 누나에게 만화책을 보여줄 때나 고구마 빼대기를 조금만 나누어 달라고 하여 정말 달게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어렸던 형님의 장래 희망이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어 부모님께서 용돈만 주시는 날엔 만홧가게로 달려가 만화책을 빌려와 형제들이 온 방에 늘어놓고 즐겼던 터라 샘물이 말랐으면 말랐지 우리 집에 만화책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요즈음이야 온난아 현상 때문에 아무리 추운 동지섣달 혹한이라고 하여 그렇게 큰 추위는 없지만, 그 시절엔 높은 빌딩 숲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았던 탓에 겨울철 혹한이 얼마나 심하게 추웠던지 잠자리에 들 때 자리 끼로 떠놓았던 물그릇에 자고 일어나면 살얼음이 얼어 있을 정도였고 땅을 파고 묻어놓았던 김장독이 얼어 터지는 일들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요즈음처럼 TV도 컴퓨터도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겨울 밤이 왜 그다지도 길었던지 노을이 지고 저녁이 되면서 기온도 떨어짐에 겨울엔 해가 땅거미도 채 지지 않아 저녁식사를 다른 철보다 일찍 해야만 했다. 저녁밥을 일찌감치 먹고 나면 긴 겨울밤이 무료했던 아이들은 할 일이 없었던 탓에 네 방구석을 뒹굴다 부모님이 일찍 자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하시면 졸리지 않아도 억지로 자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귀속에 속속 스며들듯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동지섣달 가슴 시린 혹한을 이겨내려 하는 것인가. 뺨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솟고 사지가 떨리는데 저 혹한 속을 헤집고 온 동네를 두루 다니려면 얼마나 추울까 하는 동정을 사게 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찹쌀떡!" " 메밀묵!" 이 두 가지의 소리는 내 살아있는 겨울이면 되살아나 추억 오솔길을 걸을 것이다. 너무나 지루했던 겨울밤이 미웠던 시절에 누구의 목소리보다 반갑고 정겨웠던 소리다. 지랄 맞은 잠은 어찌 그렇게 오질 않던지 30촉짜리 전구라도 켜놓았더라면 만화책이라도 읽다 잘 텐데 전기를 아끼느라 별다른 일이 없는 날이면 8시 30분만 되면 어머님의 까칠까칠한 음성과 함께 30촉짜리 희미한 불빛도 사라진다.


"아~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라야 되는 기라.."
"쪼매만 있으면 12시 통금 사이렌 울린다 퍼떡 자라.."
그러나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저만치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좀 채 잠이 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어머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지 않고 기분이 좋으신 날엔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시고는 "너거 찹쌀떡 사주가 물래...?

드물지만 이런 날은 횡재도 보통 횡재한 날이 아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나 어머님께서 속상한 일이 있을 시면 이런 횡재는커녕 날벼락만 맞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었다. 그 시대의 아이들은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 전까진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었다. 요즈음 아이들은 초등학교에만 입학할 나이가 되면 라면 정도야 대부분 끓일 줄 아니 공부를 할 경우나 늦게까지 컴퓨터를 하며 놀 경우에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면 손수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던지 빵이나 간단한 과자 등을 사다 먹기도 하지만, 그 시절 아이들은 긴 겨울밤 동안 허기가 져도 꾹 참고 자야만 했었고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 몰래 부엌에서 김장 김치로 찬물에 보리밥 한 덩이 말아먹고는 시치미를 뗀 채 들어와 자곤 했었다. 지금도 쉬 잊지 못할 기억은 오리 알을 야참으로 삶아 먹던 모습이다. 당시 우리 집 바로 옆집에서 오리를 길러 7형제 뒷바라지를 했었는데 긴 기찻길처럼 길기만 했던 겨울밤을 아무 하는일 없이 얼굴들만 바라보고 앉아계시기가 지루하셨던지 부모님은 간혹 민화투를 치시며 길고 지루한 겨울밤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곤 하셨다.

민화투 놀이에 걸린 내기 감은 오리 알이었고 형님과 나는 어떻게 부추기시던 부모님을 화투놀이를 하게 하여 뒤따르는 야참 감으로 사다 삶아 먹었던 오리 알을 노렸던 것이었다. 이 화투놀이에 옆방에 살던 아저씨 부부가 동참하는 날이면 그날 밤은 사상 최대의 겨울밤이 되는 것이었다. 세월도 흘러갔고 시대도 변했지만, 야참 찬양의 노래를 부르던 그 소리와 그 모습은 반백이 다 되어버린 나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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