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5㎏의 작은 몸 사랑은 넘치게 받았죠
어머니가 25년간 손과 발 돼줘 대학원 진학 후 화가의 꿈 이뤄
서울 종로구 안국동 '갤러리 올'에서 최근 동양화가 유경화(25)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조용한 대화로 자연을 그리다'라는 주제다. 화랑 안으로 들어서자 산수화(山水畵) 20점 사이로 키 140㎝, 몸무게 25㎏인 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러질 듯한 팔다리를 목발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지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손발로 25년을 살아온 어머니 오화순(51)씨도 모습을 드러냈다. 딸은 어머니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온 고향 대전의 풍경을 화폭에 재현해냈다.
유씨는 생후 1년6개월이 될 때까지 걷지 못했다. 1985년 어느 날 어머니는 의사로부터 딸이 선천성 고관절 탈구라는 말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다. 전신의 뼈 마디마디가 헐거워 크지도, 서지도 못하는 병이었다. 10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딸은 그대로였다.
목발 없이 설 수 없는 딸을 업고 어머니는 학교를 오갔다. 비 오는 날이면 양손에 책가방과 우산을 번갈아 들어야 했다.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휠체어를 미는 세월이 18년이었다.
다행히 딸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팔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했지만 딸은 자기의 재능을 살려 목원대 동양화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한 학기 당겨 조기 졸업한 후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그는 부러질 듯한 팔다리를 목발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지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손발로 25년을 살아온 어머니 오화순(51)씨도 모습을 드러냈다. 딸은 어머니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온 고향 대전의 풍경을 화폭에 재현해냈다.
유씨는 생후 1년6개월이 될 때까지 걷지 못했다. 1985년 어느 날 어머니는 의사로부터 딸이 선천성 고관절 탈구라는 말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다. 전신의 뼈 마디마디가 헐거워 크지도, 서지도 못하는 병이었다. 10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딸은 그대로였다.
목발 없이 설 수 없는 딸을 업고 어머니는 학교를 오갔다. 비 오는 날이면 양손에 책가방과 우산을 번갈아 들어야 했다.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휠체어를 미는 세월이 18년이었다.
다행히 딸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팔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했지만 딸은 자기의 재능을 살려 목원대 동양화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한 학기 당겨 조기 졸업한 후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 ▲ 자연과의 대화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연 '엄지공주' 유경화(왼쪽)씨가 안국동 화랑 인근에서 어머니와 함께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려 했어요. 그림을 못 그렸다면 절망했겠지만 그릴 수 있어 괜찮아요. '얼굴은 예쁜데 안타깝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행복이 있지요." 강씨는 "신체보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안타깝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다 봉변을 당한 일도 있어요. 기사가 고가(高架)도로 중간에 차를 세우더니 '기름이 떨어졌다. 내려라'고 윽박질렀어요. 목적지까지 요금을 받아 챙긴 그 사람이 사라진 후 고가도로 위에서 한참을 서있었어요." 그래도 유씨는 "세상을 원망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 생활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동아리 활동을 해보고 싶었지만 왔다 갔다 해야 할 어머니 생각에 접어버렸다. 그래도 뭔가 추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작년 5월 학교 축제 때 장기자랑 무대에 올랐다. 그때 부른 노래가 그룹 '가비엔제이'의 '그래도 살아가겠지'였다.
"예선 때는 떨렸는데 본선 때는 하나도 안 떨렸어요. 중간중간 목소리가 갈라지긴 했지만 끝까지 불렀어요. 제가 그런 용기가 있다는 게 즐거웠어요. 친구들에게 당당한 제 모습을 보여줘서 기쁘기도 했고요."
딸을 낳은 뒤 여자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만 살았던 오씨는 "내가 딸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낳아준 부모를 원망도 해봤으련만 경화는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딸이 살길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지요."
딸은 가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뼛속까지 저리는 통증에 몸부림친다. 그때마다 누워있는 딸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어머니는 생살이 파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한때는 딸과 한날한시에 같이 죽는 게 소원이었어요. 이제는 경화가 저보다도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아요. 혼자서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몸은 정상이 아니지만 저리 밝게 자라 행복합니다."
유씨의 사연이 2006년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 그녀의 집으로 '팬'들의 과일바구니와 꽃다발이 밀려들었다. 당시 그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남성도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그 남자가 사귀고 싶다며 연락했어요. 이게 사랑인가 싶어 마음을 열고 있었는데 그쪽 부모님이 전화를 했어요. '우리 아들 만나지 말라'고, 계속 만나면 찾아오겠다. 심한 말도 들었어요. 영화에만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현실이었어요.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분들 입장을 이해는 해요."
그때 이후 유씨는 많이 변했다.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놀라고 마음을 여는 것도 어려워졌다.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을 봐도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이겨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살면서 고생은 누구나 하잖아요. 저는 보통 키라도 되고 싶은데 보통 키인 사람은 더 커지길 원하잖아요.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죠. 저는 나이트클럽도 못 가보고 미팅도 못 했지만 그 시간을 가족들과 지냈잖아요. 전 남이 가지지 못한 사랑을 가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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