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안에서의 환대 | 부모자녀 갈등_01 의무가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
한 내담자는 자신이 원하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전공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고, 지도교수와 공동연구를 하며 학부생을 가르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짜인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전혀 달랐다. 모든 일이 버겁고,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막상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놓이면 하기 싫다는 감정이 먼저 치밀었고, 그로 인한 심리 적 고통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잘할 수 있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공부뿐이라 여겼고, 자연스럽게 공부는 그의 진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길 위에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상담을 통해 삶의 궤적을 찬찬히 따라가 보 니 이유는 분명했다. 영재 코스를 밟으며 겪은 과도한 경쟁과 훈련 속에서 공부 는 어느새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고, 점차 혐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총명한 자녀를 두었다는 부모의 자부심 역시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더 잘되 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부모의 개입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시와 재촉, 꾸 중으로 이어졌고, 그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강점과 적성에 맞는 길을 걷고 있음에도 늘 우울과 무기력 에 시달렸다. 상담이 시작될 무렵에는 학업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감당하기 어려 운 상태였다.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그의 자동적인 자책에서 찾기 시작했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사실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 린 시절, 부모가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건넸던 언어가 내면에 새겨져 반복 재생 되고 있는 것이었다. 망가진 녹음기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그 목소리를 스스로 인 식하고 멈추는 일이 치유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낮은 자존감 위에서 선택된 진로였다. 그는 공부를 자신의 목 을 조르는 괴물처럼 느끼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의무로만 인식된 공부는 하루 하루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있었다. 상담을 통해 그가 받아온 상처를 충분 히 다루고 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남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이 공부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라는 사 실을 다시 발견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진로는 크게 어긋난 적이 없었고, 그 과 정에서 작지 않은 것들을 이뤄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견뎌냈고, 잃어버린 시간도 없었다. 자책 대신 자신을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던 부모의 목소리로부터도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때 비로소 ‘공부’는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던 소망 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의무로 짓눌렸던 지난날은 안타까웠지만, 이제 그는 같 은 일을 전혀 다른 마음으로 하고 있었다. 의무가 소망으로 한 번 번역되었을 뿐 인데,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에너지가 달라졌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종종 삶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이야기로 해 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의무로만 살아온 삶을 소망의 언어로 다시 번역할 수 있 을 때, 변화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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