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신비, •로•사•리•오
성탄을 며칠 앞두고 30년지기 프란치스코를 주님 곁으로 보냈습니다. 암세포가 폐에서 대장으로 퍼져가는 동안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토요일 오후에 늘 로또를 사곤 했는데, 당첨되면 빚도 갚고 개인 스튜디오를 차 리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로또를 사지도 않으면서 만약 1등에 당첨되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쓸까 상상해 본 적은 있습니다. 아파트 대출금도 갚고, 오래된 차도 바꾸고, 음악하는 아들 드럼도 좋은 걸로 사주고, 부모님도 좀 더 편안하게 모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당첨된 것도 아닌데 괜히 설레고 행복해했던 기억 이 납니다. 강력한 효과를 가진 몇 억 짜리 항암 신약이 나왔다고 하는데, 친구 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지금 2026년을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성탄 대축일 미사를 마친 저는 가방 하나 메고 홀로 김포에서 멀리 전남에 있는 한 작은 수도원으로 향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말을 먼저 떠난 친구를 애도 하며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어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집 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추위에 시린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자, 무심코 챙겨간 묵 주가 손에 잡혔습니다. 무심코 묵주알을 돌리다가 어느새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 니다. 5단씩, 5단씩…. 딴생각도 하다가, 도시의 크리스마스 풍경도 바라보다가, 성 모송을 아홉 번도 하다가, 열 한 번도 하다가. 그렇게 환희, 고통, 빛, 영광을 한 바퀴 돌렸는데 이제 겨우 기차역이었습니다. 대합실에서, 목포행 기차에서, 농어촌 버스에서,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5단마다 지 향을 두었습니다. 첫 5단은 친구의 안식을 위해 정성 들여 바쳤고, 그다음은 가 족과 부모형제와 친구들의 건강을 위해서,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우리 주일학교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환경을 위해서…. 이제 뭐하지? 아까 한 거 같은데 언제나 미안하고 사랑하는 아내 로사를 위해 5억, 아니 5단 더 생색을 내고, 급기야 제 기도지향은 글로벌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묵주기 도를 하며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로또 당첨금은 금액이 정해져 있 지만, 로사리오는 무제한이었습니다. 마음껏 제 기도를 베풀었습니다. 물 쓰듯 펑 펑 쓰고 또 써도 베풀 기도가 남아돌았습니다. 간절한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넘치는 기도를 나누어주기 위해 없던 지향도 찾아내야 할 지경에 이르 렀습니다.
늦은 저녁 캄캄한 시골의 낡은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저는 족히 100억, 아니 100 단쯤으로 주변을 살뜰히 챙기고 세계평화에까지 이바지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 다. 그리고 그곳에 저를 기다리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제게 백지 로또를 주신 바 로 그 분이 도시의 화려한 교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세상 가장 소박한 모습으 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금수저,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신 채로.
아무것도 없는 아름다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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