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우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 방교원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님(예수고난회)

松竹/김철이 2026. 4. 20. 10:10

우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방교원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님(예수고난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루카 24,13-35)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2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우리 수도회 수련자 두 명과 함께 일주일 동안 도보 순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목적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날이 어 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종일 걸어 지친 몸이었지만, 조금 만 더 가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습 니다. 우리는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 사오니”로 시작하는 성가 <엠마우스>를 부르며 걸었습니 다. 도보 순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성경에서 가 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삶을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미사의 핵심, 말씀과 성찬의 전례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두 제자는 기대와 설렘 속에서 예루살렘 으로 올라갔을 겁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은 자신들의 희망이었던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이었습니 다. 두 제자는 풀리지 않는 의문과 의구심을 가지고 그들 이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 사이에 어떤 사람이 들어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겪었던 일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풀이해 주셨다는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낯설지만 경이로운 체험이었고 신비스러운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낯선 그 사람을 초대합니다. 제자들 과 함께 식탁에 앉은 그 사람은 집주인처럼 행동합니다. 제자들에게 빵을 들고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분이 바로 며칠 전 십자가에서 죽었던 주님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에 대해 복음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분 과 함께 식탁에 있었고, 그 시간을 통해 자신들이 하느님 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으며, 그들의 삶이 바뀌 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만 남, 비참한 인간이 그리스도 하느님과 하나 되는 그 신비 를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쳐 지나가더라도 하느님을 언뜻 본 사람, 부활하시 어 빛과 영광 속에 계신 주님을 본 사람은 행동합니다. 엠 마오의 제자가 가던 길을 바꾸어,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 을 고백하고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듯이 말입니 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계 속해서 일어나야 할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 리의 몸과 마음, 영혼이 타오르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