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과 ‘마음의 선한 곳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서울대교구장)
오늘 우리는, 루카복음 6장 예수님의 ‘평지 설교’의 한 부분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첫 부분은 ‘형제 눈 속의 티 는 보면서, 제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고,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말씀은 두 번째 부 분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산상 설교’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 옵니다. 그런데 작은 차이점은, 마태오복음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언급하신 다음,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 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7,19)라는 심판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 데 반해, 오늘 루카복음에서는 ‘좋은 열매, 나 쁜 열매’ 언급 후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 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 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라고 ‘마음의 문제’로 결론을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마태오복음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참된 행복 선언을 떠올려 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반면에 루카복음의 행복 선언에서는 단순히 “행 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요. 희랍어 원 문의 표현을 찾아보면, 오늘 루카복음에서 “마음에서 넘 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마음의 문제’를 언 급할 때 ‘마음’은 ‘심장’(καρδία, 카르디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마태오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할 때의 ‘마음’은 ‘영’(πνεύμα, 프네우마)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심장’은 ‘육체적 생명의 자리’로 이해되고, ‘영’은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생각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다시 봅니다. “너는 어찌 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6,41)는 예수님의 아픈 질타를 묵상하면서,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 통된 인간 속성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 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로남불’을 넘어서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가 꾸는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 으로 말하는 법이다.”(6,45) 이기적이고 나약한 우리가 선 한 마음의 곳간을 짓기 위해서는 하느님 영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마음의 선한 곳간’을 넓혀가려는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겸손되이 하느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 봅니 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 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 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 롭게 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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