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서 생기는 마음의 평화
30살이 막 되었을 무렵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다녀왔습 니다. 사실 그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친한 언니들 이 가자는 말에 가볍게 여행가는 마음으로 따라나섰을 뿐 이었습니다. 침낭을 챙겨야 한다는 언니의 말에, 저는 7 세 이하 어린이들이 쓰는 귀엽고 작고 예쁜 침낭을 챙겼 습니다. 예쁜 등산복에 드라이기와 화장품도 잔뜩 챙겨서 배낭에 넣고 룰루랄라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순례 시작지인 생장으로 가기 위해 들른 파리 공항에서 이미 시련은 시작되었습니다. 호텔을 찾아 헤맨 지 1시간이 되었을 즈음, 외국어 하나도 못 하는데 여길 무슨 생각으로 왔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공항조차 빠져나가지 못하고 빙빙 돌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순례가 시작되고 나서, 이 불안함은 기어코 후회로 바 뀌고 말았습니다. 첫날부터 너무 힘들었습니다. 온갖 것 을 다 채운 배낭은 너무 무거워 무릎이 부서질 것만 같았 고, 무릎도 다 덮지 못하는 어린이용 침낭은 너무 야속했 습니다. 게다가 숙소는 기대했던 것처럼 호텔 같은 시설 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이 되면 험하고 어두운 길을 여자 셋이 걷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려웠습니다. 후회는 점 차 심해져, 이곳까지 저를 끌고 온 언니들이 미워질 지경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홀로 가고 있는 어느 신앙 깊은 순례자 를 만났습니다. 그 뒤만 졸졸 따라가면서 무사히 그 험한 길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마음의 짐을 덜기 위 해 왔다고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걷다 보 니,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보이 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순례에 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고백하는 저를 격려해 주는 누군 가의 이야기가 참으로 감동적이고 감사했습니다. ‘사실 나도 생각을 많이 하고 싶어서 왔는데, 막상 오니까 먹고 자는 것이 너무 중요해서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 런데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비우니 더 편안하다.’라고 말 이죠. ‘비워서 생기는 마음의 평화! 주님께서 그걸 깨닫게 해 주시는구나.’ 싶었습니다. 온갖 불필요한 물건을 배낭 에 가득 채우고 와서 놀기만 바랐던 제게 주님은 다른 것 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항에서는 버스를 타고 호텔까지 따라와 서 길 안내를 해줬던 고마운 여학생을 만나게 해주셨었고, 어두운 저녁 길에서는 귀국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는 소식을 들려줄 만큼 신앙 깊은 청년을 만나게 해주셨었 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배려해 주고 좋은 말로 격려해 주 며 침낭도 돌아가면서 덮어줬던 정말 고마운 언니들을 옆 에 보내주셨습니다. 그제야 진정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항 상 어려울 때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 의지할 때, 당신께 서 천사를 보내셔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요.
'세대간 소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룩 | “그 누구도 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2) | 2024.12.07 |
---|---|
벼랑 끝에 서고나니 올 데가…. (1) | 2024.12.03 |
청소년 특집 | 삶을 헤쳐 나갈 힘 (1) | 2024.11.28 |
말씀의 이삭 | 흥! 아무리 막아봐라! (1) | 2024.11.26 |
누룩 | ‘내던져진 존재’들에게 부치는 가을 편지 (1) | 202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