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 |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님(제14 동작지구장)

松竹/김철이 2024. 11. 3. 10:20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님(제14 동작지구장)

 

 

우리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꼭 1등이 누구인지 정해야만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 중에서도 누가 더 좋은지 선택을 강요받으며 커온 우리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일인가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한 율법 학자도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 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하고 싶었던 질문을, 고맙게 도, 이 율법 학자가 대신해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율법 학자는 분명히 한 개의 정답을 바라고 질문했을 것입니 다. 정말 첫째가는 1등 계명이 무엇인지 깔끔한 한 개의 정답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답을 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는 두 개의 계명을 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두 날개가 되어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날개가 있어야만 하 느님께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어느 하나만 고 집하고 어느 하나에만 치우쳐서는 결코 날아오를 수 없 습니다.

 

전설의 새 비익조는 암수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 새입니다. 그래서 둘이 몸을 꼭 붙여 껴안고, 하나 된 날갯짓을 힘차게 할 때만이 비로소 하늘을 향해 비상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느 한쪽의 날개가 아 니라 하느님 사랑이라는 날개와 이웃 사랑이라는 이 두 날개가 마치도 비익조처럼 하나의 날갯짓을 할 때, 하느 님을 향한 힘찬 비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할 뿐이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요란할 뿐입니다. 사족을 덧붙 이자면, “하느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쉽게 혹 은 어느 정도 무책임하게 “네.”라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너 자신 처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민과 망설임을 동반한 깊은 반성과 사색 이 요구될 것입니다. 아마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양심 적이고 솔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날개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하나 됨의 조화를 이 룰 때만이 하느님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