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왜 그럴까? |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님(양업고등학교 교장)

松竹/김철이 2024. 7. 5. 09:45

왜 그럴까?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님(양업고등학교 교장)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 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 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 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새,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이 누이 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2-4)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방문하신 안식일에 나자렛 회 당에서 가르치셨다. 고향 사람들은 먼저 놀라워하면서 도 동시에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왜 그럴까? 고향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 하지 못하는 걸까? 함께 잔치를 베풀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가까운 이웃들이 대체 왜 더 무시하고 배척 하는 걸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편견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을 낳는다. 고향의 지인들은 그분의 출신과 내력을 잘 알기에 그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다. “저 사람은 분명히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임을 우 리 동네에 일가친척들이 다 있는 것을 아는데 말이야.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확신 너머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과거 때문에 현재의 중요성 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서의 예수라는 인물의 중대성이다. 현재 나자렛 예수는 탁월한 하느님 말씀의 해설자요, 하느님 힘을 드러내시 는 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악령이 복종할 정도 로 권위 있으시고, 바람과 호수, 자연이 복종할 정도로 권위 있는 분이시다.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분, 심지 어 죽음의 세력까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소 생시킨 분이시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이토록 중대한데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 도 듣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하, 그렇다면 오늘 고향 사람들의 오류가 그들 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가끔은 나 역시 그네들과 별 반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 때문에, 그들과의 유쾌하지 못 한 경험으로 인해서, 은연중에 무시하고 배척하지 않 았던가.

 

주변 사람들을 이런저런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두고, 그들이 변화되고 성장했음에도, 그들을 인정해 주거나 믿어주지 못했던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나의 확증 편향은 내 생각과 일치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 반 대의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내 의견에 맞게 왜 곡하지 않았던가.

 

주님, 당신의 고향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스스로 정해 놓은 고정 관념들에서 벗어나 주님을 늘 새롭게 만나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