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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 ‘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2024 03 07

松竹/김철이 2024. 3. 7. 07:16

[‘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03 07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wXVahVkQlJc

 

 


2024년 나해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영화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은 도쿄 한 호텔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두 명의 미국인 밥 해리스(Bob Harris)와 샬럿(Charlotte)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밥은 유명 영화배우지만 인기가 조금씩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20억 원의 돈을 받고 도쿄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온 것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동양 문화에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집에 전화해도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결혼 24년 차이기 때문입니다. 
밥처럼 같은 호텔에 있으면서 잠 못 드는 샬롯은 결혼 2년 차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출장이 잦은 남편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샬롯도 여전히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롭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술 한잔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둘이 함께 있으니 잠이 옵니다. 둘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선을 크게 넘지는 않습니다. 밥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둘은 헤어지기 아쉬워합니다. 밥은 아쉬워하는 샬롯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귀에 대고 뭐라 말합니다. 샬롯은 얼굴이 밝아지며 영화는 끝납니다. 
 
과연 저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행복할까요? 어쩌면 더 큰 일탈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잠 못 드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계속 일탈을 꿈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표징을 보여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당신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나라도 나라고 천국의 나라도 나라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갈라지면 나라는 망합니다. 마귀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악으로 단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악한 자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하늘이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 아니면 사탄의 편, 두 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도는 없습니다. 빛 안에 어둠이 속할 수 없고,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이미 사탄 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과 저녁은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벽은 빛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이고 저녁은 어둠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기로 했느냐에 따라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쉬는 교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편일까요, 어둠의 편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편임을 멈춘 상태입니다. 빛의 편이었다면 조금씩 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멈춘다는 말은 어둠으로 가고 있기에 어둠의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냉담자들을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쉰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걷다가 쉬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쉰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밥 먹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물 마시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힘이 빠져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냉담 교우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오히려 그런 칭호가 냉담을 회두시킬 필요가 없게 만들고 그들도 자신들의 상태가 빛으로 나아가는 줄 착각하게 합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타쉬는 절에서 나와 결혼합니다. 신앙을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내와 자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쾌락의 기쁨을 알아버렸고 아내와 자녀가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쉬면 조금씩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의 길을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쉼은 생명을 회복함이지만, 냉담은 죽음을 선택함입니다. 이 절실함이 자녀들이 공부를 위해, 직장과 혼인을 위해 신앙을 잠시 쉰다고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을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사랑은 쉴 수 없습니다. 사랑을 쉰다는 말은 사랑이 식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에 올리면 뜨거워지고 불이 없으면 식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신앙, 아니면 불신앙입니다. 쉬면 죽는 게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