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불편한 말씀 | 박효재 F. 하비에르 신부님(강구 본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4. 1. 20. 10:00

불편한 말씀

 

                                           박효재 F. 하비에르 신부님(강구 본당 주임)

 

 

“에너지 사용을 줄여 사랑을 나눕시다!” 올해 교구 실천사항입니다. 본래 사제총회에서 검토되었던 구 호의 초안은 “불편하게 삽시다!”였는데 듣기에 좀 덜 불편했으면 하는 취지로 쓴 약에 사탕을 좀 발랐습니다. 말은 달콤하게 했지만, 하느님 백성이 굳이 불편하고 좁은 길을 택해 걸어야 한다는 진리는 어떻게 희석될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주님 백성은 세상의 99%와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은 불가피한 불편, 예언자적 고난을 동반합니다.

 

예언자들은 99%의 사람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이들입니다. 99%의 사람들이 저 가 유리할 때만 정의 찾고, 적당히 서로 속이고 또 속아 넘어가 주며, 애매하게 타협하여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99%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잖아’ 서로의 불성실을 격려할 때, 예언자는 미친 사람 취급받으면서도 ‘아 니다. 잘못되었다. 억압받은 이방인, 고아와 과부의 울 부짖음이 주님 대전에 올랐다. 온 세상이 주님을 거슬러 살고 있다. 모두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홀로 그 불편한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은 100%를 넘어 무한히 다르시기에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다가오셔야만 했 습니다. 이를 우리가 ‘하느님 말씀’이라 부릅니다. 그 말씀은 세상 다수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이 무한한 다름을 소수의견을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처럼 ‘잘한다, 잘하고 있다. 하느님도 우리(다수)와 같은 생각이시다’하고 사 람 비위만 맞추고 있다면, 하느님과 피조물의 무한한 차이는 숨겨지고 강자가 약자를 침묵시켜 만들어낸 폭 력적 만장일치만이 남을 뿐입니다. 반면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예언적 소수의견 안에서 전달되지만, 만인의 영혼에 호소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 우리 마음을 울리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 하느님과 창조 사이 그 무한한 거 리를 이어주었던 같은 말씀 말입니다. 그 무한한 거리를 메우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100%, 전부, 완전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 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방금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며 처음 선포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 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우리가 신앙의 배짱으로 감당해야 할 세상의 99%란 다수의 폭력만이 아니라, 내 삶의 관성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당연함을 거슬러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라는 이 명령은 참 불편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껏 다른 방법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삶의 방식 그리고 그 유용한 수단들, 곧 내 손에 익은 그물을 버리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삶의 변화를 불러오는 주님 말씀은 무엇인지요? 모두의 무사안일함이 불러온 이 기후위기 시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요나 3,4)는 요 나의 선포는 모든 시대를 넘어 참으로 오늘 이 세대에 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말씀 주일을 맞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당신 말씀을 오늘 우리가 기쁘게 들을 수 있는 소수의 남은 자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께 청해봅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1코린 7,31 참조)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