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가난한 이의 벗이 되어… | 나충열 요셉 신부님(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松竹/김철이 2023. 11. 19. 08:25

가난한 이의 벗이 되어…

 

                                                                  나충열 요셉 신부님(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예전에 어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한 달 동안 현장 실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로 했던 일 중 하나는 기초생활 수급자나 차상위 가정을 대상으로 가정방문 상담을 하는 것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오후에 대여섯 집을 방문할 생각으로 한 집에 대략 30분 정도씩 시간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첫날 첫 집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제가 다 른 집으로 가기 위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하면 또 다른 얘기 를 하시며 거의 한 시간 동안 저를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예상에서 어긋 나는 당황스러운 첫날을 보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래서 다음날 부터는 아예 시간 계획을 세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갔습 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살이지만 가는 곳마다 하얀 종이컵 에 정성스럽게 탄 커피믹스 한 잔을 부끄러운 듯 내어놓는 주 름진 손을 보며 이내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습니다. 도란도 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 시간만큼은 가난이 주는 삶의 무게 를 잊게 만드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을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 리는 그 결핍을 무언가가 없다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이해 하려 합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은 곧 내가 가진 물질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맞습니 다. 지금 당장 배고픈 이에게, 지금 당장 목마른 이에게는 허기를 채울 빵과 갈증을 해소할 물이 최선일 것입니다. 하 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가난의 고통은 물질의 결핍이 아닌 마음의 결핍이 더 크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 경험처럼 더 이 상 혼자가 아닌 누군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내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힘과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삶의 자리를 돌아보아도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단, 우리가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탈 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모두 넘치도록 풍성하게 받 았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가장 적게 받은 것처럼 보이는 한 탈렌트도 당대 기준으로는 6천일 간의 일당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정작 우리 자신의 탈렌트 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 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 에 오시어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 에 따라 우리 신앙인들도 가난한 이의 벗이 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청 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