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松竹/김철이 2020. 12. 1. 03:46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WgkhozxnHmw

 

 

예수님의 기분 좋은 기도를 듣습니다. 그 기도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와서 누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된 아들의 흥얼거림과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과 사건 속에서 주로 예수님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반성하거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그 묵상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주님이 전해야 하는 말씀의 수혜자가 선발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기다리는 4천년을 보냈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에 따른 일종의 모델들을 찾았습니다. 바로 그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지혜와 슬기로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스라엘은 의인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위치는 그런 의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오셨고 그들의 삶이란 의인보다는 죄인에 가까운 삶이었습니다. 몰라서 죄인이고 가지지 못해서 죄인이며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삶이었습니다. 그 중 누군가는 노력해 의인의 대열에 들어설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의인의 대열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찾을 때 의인 속의 의인으로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의인들까지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뜻은 세상의 선택과 달랐기에 오히려 이 뜻에 수긍하고 기뻐하는 의인은 소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라 하십니다. 주님은 이 상황을 몹시 즐기고 계신듯 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런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행복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영문을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4천년의 편견을 무너뜨리고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는 기쁨은 우리가 지금까지도 계속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없애야 보이는 지혜입니다. 그 이전의 예언자와 임금들도 그러했듯 지금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가능한 구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