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eA_DTkEqx3I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당장의 박해는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마저 많이 유입되어 있는 우리 사회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삶이 세상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위협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와 사람들은 '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아니면 외면이나 냉담이 가장 마지막에 내리는 결단이 전부인 세상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안전하게 지켜지고 나름대로 유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안의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주님의 박해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은 다소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아주 오래된 선조들을 생각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박해와 증언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안전함을 기뻐할 수도 있고 다행이라 행운을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 사회 속에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에 모두 동의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면 정말 기쁜 일이지만 많은 경우 교회는 사회의 모습에 멀리 있는 듯 느껴지고 또 사회도 당연한 듯 교회는 세상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제한된 영역에서 활동하며 유지하고 신자수에 매달리면 그만인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향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란 신자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교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전부가 되어 있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이 정치나 사회, 경제에 이르기까지 진출한다는 것은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는 과정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저 신자라는 타이틀이 전부인 지경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결정은 사회를 형성할만큼 중요하지만 단지 그들이 주일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우리가 자랑하는 전부이고 그들의 결정에 신자로서의 가치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히 반쪽짜리나 그 이하의 삶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이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의 삶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전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며 그렇게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접근할 수 있어야 우리는 증언할 기회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공부하거나 연구하거나 묵상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가치가 아닙니다. 주님은 글을 쓰신 것이 아니라 사셨기에 우리는 그분 곁에서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받는 질문과 그분의 영향을 두려워한 사회가 박해를 벌이고 분란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어색하게 멀리 평행선으로 서 있으면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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