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松竹/김철이 2020. 10. 26. 09:42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LJ4dI6efYYc

 

 

 

안식일에 회당에 나타나신 예수님. 이스라엘 사람으로 안식일을 지켜 회당에 들리신 예수님은 회당 안에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십니다. 안식일에 그저 회당에 들려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마주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멈추어 계신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하심의 역사에 감사드리며 정성을 바치는 독백과 같은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또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생활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주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오늘은 열여덟 해 동안 고통을 받던 여인을 병에서 풀어 주십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은 밀이삭을 뜯어 씹었고 주님은 그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모두 안식일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모두가 잠자코 숨죽이는 날에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예수님이십니다. 

 

 

회당을 지키는 회당장은 화를 냅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 말합니다. 회당장의 권위를 가진 이야기입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인데 왜 안식일은 안될까요? 입으로는 하느님은 사랑이라 말하고 구원의 주님을 말하면서도 왜 안식일은 사람을 구할 수도 도와줄 수도 없을까요? 안식일이어서 그렇다는 말이 과연 누구의 이해를 받을 수 있을까요? 열여덟 해를 고통받은 이에게 하루는 참을 만한 하루일까요? 그의 어려움을 안 사람에게 그런 기다림이 필요한 가치가 있을까요? 하느님은 그 기다림에 기뻐하시며 만족하실까요?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안식일을 서슴없이 어기는 이들이 사람들의 회당에서 율법을 말하고 규정을 준수하라 말합니다. 정작 아프고 힘겨운 사람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면서도 그들에게는 글자로 이어진 규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조차 그런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안식일의 의미를 바로 세우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분의 외로운 움직임에 안식일은 요동을 칩니다. 하지만 그 때도 현실은 회당장의 한 마디가 컸을 겁니다. 안식일에 사랑을 하신 주님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십자가를 지셨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날, 주일을 지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일은 이런 주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성당에 나오는 것 외에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이 주일에 해야 하는 것의 전부라면 2천년 전을 거슬러 올라간 이 사건에 우리가 너무 미안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