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라 밖의 물정은 잘 모르고 사실 관심도 가질만한 정보도 별로 없는 터라 고민의 정도와 범위도 나라 안에 한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죄'나 '잘못'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가르침이었고, 죄는 아닐지라도 잘못이나 미숙함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만큼이나 윤리의식에 있어서 고지식한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만큼 강조되어야 할 것이 '용서'입니다. 혹은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형성되는 것은 모든 이가 결국 함께 살아야 할 사회에서는 순서를 따질 이유 없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인색하거나 아예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불러 옵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짓는 경우는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사회 안에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잘못을 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참 서툰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그 서툰 모습이 죄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가 됩니다. 다시는 똑같이 살 수 없다는 무거운 형벌을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문화, 그리고 용서라고 말하지만 다시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누구나 아는 죄인이었던 여인이 주님 발을 향유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을 때 그 자리의 의인들은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이유는 그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런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곧 그들은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죄는 피해야 하고 물리쳐야 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죄에 대한 가르침 만큼이나 용서를 보여주셨고, 그 용서는 통회의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듯 등장했습니다. 곧 죄인일 수록 주님이 더 필요하고 반복되는 죄의 굴레를 끊어버리는 원리가 멈춤이 아닌 사랑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들의 친구라 불릴만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말한다면 예수님처럼 주변에 죄인들이 머무는 것이 당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모아 놓고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함께 살아감으로써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곧잘 말합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만 골라낸다면 우리 중 누가 한 자리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당의 자리는 죄인들과 의인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생명의 제대가 그렇고 생명의 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들만의 은총의 자리인 고해소를 품고 있지 않습니까?
용서받을 일이 없는 사람들만 모아 놓는 성당을 원하십니까?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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