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강론 듣기 : https://youtu.be/4PXPGLooC1o
성주간 월요일에 읽게 되는 복음에서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아무래도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마리아의 행동입니다. 성주간이라 주님의 죽음 앞에 드린 예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녀의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께 어떤 것도 아까울리 없었던 행동이 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분께 값비싼 향유를 붓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머리를 주님의 발 위치에 놓고 닦아드림은 그냥 '종'의 행동으로 볼 수도 없는 가장 낮춰진 자세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의 발치에 있었던 한 사람의 솔직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여인의 모습과 상반된 여러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성주간이어서인지 그들의 행동이 더 크게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는 요한복음의 저자에게 도둑으로 몰리지만 그의 말에는 향유의 값과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질 몫이 비교됩니다. 우리도 가끔씩 누군가의 재물을 두고 같은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서 그의 말이 이해가 되기도 또 밉게 들리기도 하지만 주님은 그런 생각을 가진 제자를 타이르시며 지금의 때가 당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는 이 향유가 그날 그렇게 주님께 드려진 몇 안되는 우리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보다 돈이 더 궁했던 유다 넘어 예수님을 보러 온 다른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받은 라자로를 보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을 지켜보며 예수님에게 일어난 이 일로 주님과 라자로까지 모두 없앨 생각을 합니다. 그들에게 여기 모인 이들은 위험한 이들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악한 분으로 둔갑합니다.
아주 먼 발치에서 이 일을 지켜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고 자신을 위한 예물을 받아들인 것을 지적하는 제자의 어리석은 판단과 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스런 노력을 했던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의 어리석은 생각과 높은 자리의 살인자들의 의도는 지금도 많은 경우 성공하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들의 의도를 늘 의심받고, 그들로 인해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인간됨을 찾으려는 이들은 부족함들을 조롱 받으며 결국 사람들과 세상 안에서 밀려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의심과 살인자들의 의도로 찾아온 주님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가 결국 모든 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열쇠요 희망이 된다는 것 또한 압니다. 그날 그 방을 채웠던 아름다운 향유를 우리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가까운 이들은 모두 손에 이 향유를 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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