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5부작 골목 이야기 제2화
응달에도 햇살이
김철이
세상 사람들은 죄다 햇살이 화창하게 비취지는 양달을 선호하고 꽃이 활짝 펴있는 날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응달은 영원한 응달로 여기는 한편 화사하게 피는 꽃 자체만 느끼고 즐길 뿐 꽃이 피는 과정과 그 과정 사이 꽃이 겪을 힘겨움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응달이라 하여 영원한 응달도 없을 뿐 아니라 응달도 꽃은 피운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진달래도 응달에서 즐겨 피었고 금난초는 응달에만 피는 꽃으로 알려졌으며 제비꽃은 제비꽃인데 서울 남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됐다 하여 남산 제비꽃이라 이름 붙여진 남산 제비꽃은 응달에서 피면서도 줄기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도 세계 역사의 반은 응달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옛날 속담에 대장부는 골목길은 걸어서는 안 되고 대로만 걸어야 한다고 했지만, 골목길이 우리나라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잘 닦아진 대로에서 느낄 수 없는 인간미를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광주광역시 광산구 내산동 쌍내 길에 얽힌 이야기로부터 골목 이야기 두 번째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내동과 쌍계 두 마을을 합쳐서 "쌍내"라고 불렀데. 내동은 한때 마을 앞에서 두 시냇물이 합류한다. 하여 '거을묘(巨乙墓)라 불리기도 했으나, 6·25동란 후 마을이 작아지면서 두 마을을 합쳐 쌍내라 부르게 되었다. 쌍내마을 건너편 정자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정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곤 한다. 정자 옆에 있는 나무는 15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마을 주민들이 제2의 제주 올레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약 300년 전에 임씨, 김씨, 구씨등 세 성씨의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으나 18세기 초에 신창 표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치 비밀의 화원에 온 듯한 야생의 돌담길, 영험하고 물맛이 좋다던 마을 앞 우물, 석재 연자방아는 현재의 정미소와 같이 재래의 우리 곡물 가공 기구였다. 이들 연자방아는 오늘날 전통마을에서는 그 잔재가 남아 있었으나, 마을의 담장 축조나 휴식처의 초당 부근 또는 골동품 상인에게 반입되어 아쉽게도 소멸되었다고 한다. 쌍내 마을의 연자방아는 정미소의 출현으로 그 역할을 못다 한 채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 방치되고 있다. 한때는 그 역할 또한 소중했으나 현재는 마을 당산나무 밑에 버려진 채로 기둥구멍을 시멘트로 발라 막힌 상태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형체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마을 뒤쪽에는 옛날 장군이 말들 타고 지나갔다. 지혜로운 선비가 말을 타고 지나갔다 해서 이름 붙여진 병풍바위, 말바위, 갓바위 등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많이 늘려있다. 연세 높은 동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너럭바위 밑에는 말 탄 장군이 지나간 발자국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공룡 발자국이 아니었나 하는 추정들도 하곤 한단다. 한편 이 수많은 큰 돌들이 고인돌 터가 아닌가? 하는 추정들도 난무했다 한다.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지다 부족하여 이국적인 풍경에 푹 빠져 시간이 멀리 달아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시간의 발걸음이 멈춰버린 이곳 쌍계마을, 쌍내 길엔 조상들 숨결은 살아있다.
부산광역시 초량동에도 옛 조상들의 숨결 맥박 뛰는 소리와 일상생활에서 묻어나는 손때의 잔해들이 주인을 잃고 뽀얀 흙먼지 속에 질서없이 나뒹구는 골목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부산 동구 초량동 이바구길이다. 이바구란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인데 선전포고도 없이 6·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허울 좋은 공산주의 이념과 억수같이 퍼붓는 포화를 피해 피난 온 북한 실향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아 숱한 희로애락을 지어내며 살았다 하여 이바구길이라 이름 붙였다. 이바구 골목 안에는 한류스타 가수 나훈아와 개그맨 이경규의 생가가 있고 이 두 사람을 비롯한 음악감독 박칼린의 어린 시절이 묻어있으며 이러하듯 나름대로 한 시대 역사에 일조했던 인물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바구길은 앞으로도 또 다른 이바구 거리를 지어낼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골목길 해외 여행객들의 여행 여정의 정식 코스인 감천동 문화마을, 이곳 주민들과 예술가들의 마음이 뭉쳐 다닥다닥 산비탈에 알록달록 자리 잡은 감천동의 문화마을은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을 얻으며 지난해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어 국내 관광객은 물론 해외에서도 사례 연구를 위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다. 형형색색의 자유로운 페인트칠의 성냥갑을 닮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마을은 멀리서 보면 흡사 '산토리니' 또는 '마추픽추'처럼 보여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부산의 자랑일 것이다.
골목마다 사연도 많고 애환도 많지만, 이국적 풍향이 돈다 하여 정녕 돌아서 외면할 수 없는 골목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태원 골목이다. 서울 이태원 골목길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배나무가 많아서 이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은 과거 한강의 물길이 닿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에는 외국군이 주둔하게 되었지만, 이태원 골목길도 분명 옛 조선의 땅이고 한민족의 얼과 넋이 죄다 묻힌 곳이며 백의민족 옛 조상들의 흔적만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은 껌 딱지로 남을 것이다.
광주광역시 광산 신촌 장암길, 이 골목은 마을 앞에 길고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원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극락강 천변 가까운 제방 안에 있었으나 홍수피해가 잦아 1940년 초 제방이 축조되어 전호가 지금의 자리인 제방 외곽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조선조 말기 19세기 초에 생성된 마을로 축산 안씨, 안동 권씨, 인동 장씨 삼성이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와 삶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당시 마을 앞 천변에 큰 주막이 있어 전국에서 끊임없이 모여든 무중간상인과 광송간을 도보로 왕래하는 인파로 붐볐다고 한다. 이렇듯이 신촌 장암길도 한 시대의 주인 노릇을 야무지게 했다는 것이다.
한적한 외딴곳에 자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 구석길, 이 또한 하나의 골목길인데 맥동 보리사라는 절이 있어 보리동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맥동이 되었다고 풍문은 전한다. 卵山亭 알 모양의 산기슭에 있으며 [난산정]이 있었는데 맥동은 원맥동과 난산정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원당은 원당봉 아래 있었는데 맥동으로 합친 것 같으며 하등산과 관정은 추정이 불가능하다. 원맥동은 1410년경 울산김씨의 장성 입향지로써 하서 김인후 선생의 태생지이기도 하다. 마음의 고향인 골목은 어디든 이렇게 선조들의 혼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 보배스런 골목은 많으나 이러한 보배들을 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쌓여 선조들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숨 쉬는 몇백 년 된 골목길을 하루아침에 허물고 국적도 불투명한 시멘트를 처발라 선조들 영혼의 가슴에 영영 뽑아낼 수 없을 대못을 박고 선조들의 그림자마저 송두리째 묻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는 것이다. 갈지자걸음을 걷는 바닷가 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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