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야경꾼/(수필) 월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14. 3. 20. 14:12

야경꾼

 

 도심지대로 길섶에 속해 있는 일반 주택에서 생활하다 보니 밤이면 갖가지 차량소음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허다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밤잠도 잊은 채 이따금 배달 오토바이 소리나 세상사 무슨 불평이 그리도 많았던지 술의 힘을 빌려 해 묶은 속마음을 대로에 풀어놓는 취객들의 고성방가는 그래도 들어줄 만하다. 간혹 주택가를 쳐들어와서 고요한 밤을 통째 흔들어 깨우는 폭주족들의 오토바이에서 울리는 굉음은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다. 이 오토바이 굉음은 폭주족들이 일부러 소음기를 떼어내 나는 소리라 하니 더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토바이의 굉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어릴 때 야경꾼들이 현재 부산 제일의 시가지로 변신한 연산동 전체의 골목을 두루 돌아다니며 딱딱이를 울리던 생각이 떠오른다. 유년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지금의 부산시청 청사가 위치한 근처였다. 당시만 하여도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치안의 질서가 엉망이었던 데다가 경찰인력이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주민이 스스로 자경단을 조직하여 야간순찰을 하였다. 우리는 순찰을 하는 자경단을 야경꾼이라 불렀다. 밤이 이슥해지면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살을 예이는 겨울 골목길 길섶에 애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다 10시가 조금 지나면 앞다퉈 귀가하려는 발걸음이 종종걸음을 치고 메밀묵 찹쌀떡 장수의 소리가 뚝 끊기고 야경꾼들이 울리는 딱딱이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간간이 울려 퍼졌다. 당시 자경단은 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자경단의 순찰근무는 닷새에 한 번꼴로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았던 연산동은 동네 전체의 주민이 철도원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어 누구 집 숟가락이 몇 개이며 누구네 집에 누가 다녀갔는지까지 훤히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데게 가정의 가장들이 현직 철도원이었던 터라 굳이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을 만큼 동네 주민이 한 가정의 가족처럼 친했던 덕에 큰 사건 사고 없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밤의 안전을 누군가 책임져야 했기에 밤이 오면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로 자장가를 삼았던 시절도 있었다.

 

 야간통행금지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조선 시대 때, 한양에서는 이경(二更)인 밤 열 시가 되면 보신각에서 종을 이십팔 번 울려통행금지를 알렸으며 사대문을 닫아 사람들의 성내 출입을 막았다. 이것을 인경(人定)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경(五經)인 새벽 사시께가 되면 쇠북을 서른세 번 울려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사대문을 열었다.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했다. 그래서 순라군들은 인경이 울리면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박달나무로 만든 딱딱이를 울려 도둑을 쫓았다. 통금을 위반한 자들은 즉시 잡아들여 초경과 오경 위반자는 곤장 열대, 이경(二更)과 사경(四更) 사이 위반자는 곤장 이십 대, 삼경 위반자에 대해서는 곤장 삼십 대에 처할 만큼 그 당시 통금 법은 몹시도 엄격했었다. 그래서 순라군이 도둑을 잡는 것에서 술래잡기(순라잡기)라는 놀이가 생겨났던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남한에 진주한 미 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치안 유지의 목적으로 서울과 인천에 민간인들의 야간통행을 금지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해 시행하게 되었다. 통행금지는 성탄절과 제야의 밤 등 특별한 날에만 한때 해제되었으며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만약 이를 위반하면 즉심에 처하고, 경찰서 보호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천구백팔십이 년에 야간통행금지는 전격적으로 해제되었다. 통금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권 회복이라는 상징성 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민간인들에 대한 통제가 가장 심했던 제오공화국 때 이를 해제하였으니 한 편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책과 승부가 나지 않는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인 천구백칠십 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 하늘의 뜻도 모른 채 미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꿈꾸며 각종 아동문학 서적을 읽고 습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전 지역의 전기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터라 반찬이라야 시래깃국에 콩나물 무침에 불과했지만 온 가족이 낡은 나무 두레상 둘레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던 저녁 밥상머리에 갑자기 정전되니 밥을 먹다 말고 양초와 성냥 통을 찾노라 한 때 난리법석이 일곤 했다. 그 시절 일반 가정에서는 양초와 성냥은 필수적으로 방마다 비치해 두어야 했다. 하루해가 저물고 초저녁만 되면 저녁밥 빨리 먹고 빨리 자라는 어머니의 성화가 늘 귓전을 맴돌곤 하였다. 당시 철부지 어린아이의 생각으론 밤을 지키는 야경꾼 아저씨들은 밤이 너무 짙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딱딱이를 어떻게 정확하게 맞춰 소리를 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 아닌 걱정마저 했었던 적이 있었다. 해서 그 신기한 야경꾼 아저씨들의 세계를 엿보고 싶어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잠든 부모님 몰래 나지막한 창문 고리를 빗기고 야밤이 잠자는 밖을 내다봤으나 그 시절의 야밤은 왜 그리도 어둡고 암울했던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칠흑 같은 야밤의 검은 그림자 뿐이었고 들리는 건 소쩍새 애조 띈 하소연뿐, 동심의 궁금증을 풀어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맹인 안마사의 피리 소리가 희미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밤의 적막을 깨고 나타나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 이 딱딱이 소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있다. 세파에 무뎌진 기억의 창을 깨고 빼꼼히 들여다보는 추억의 모습은, 내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서울 출장에서 사다 주신 열두 권 묶음의 동화책 세트를 읽고 또 읽어도 동화책을 향한 갈증이 씻어지지 않아 그날도 저녁 식사 후 다 읽은 동화책을 다시금 펼쳐 든 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어머니께서 이부자리를 깔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입이 삐뚜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나는 단잠을 자긴커녕 동화책이 눈앞에 아롱거려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곤한 잠에 빠진 듯 방마다 고요해질 무렵 조심스레 작은 방문이 열리더니 믿음직한 부친(父親)의 손길이 나의 몸을 감싸 안은 것이다. 겉으로 보기와 달리 여린 성품이 많은 아버지께서 동화책에 향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내게 작은 방에서 전깃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불빛이 큰방까지 세어 들어가니 마치 이층침대처럼 생긴 오시레(붙박이장) 아래층 속으로 들어가 못다 읽은 동화책을 읽으라며 전구가 달린 긴 전깃줄을 오시레로 넣어주시는 것이었다. 그날 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야경꾼 딱딱이 소리와 동침하며 긴 밤을 꼬박 새웠다. 

 

 세상을 모태(母胎)로 사시사철 흐르는 건 강물뿐 아니라 세월과 인간의 기억 속에 흐르는 추억을 표본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추억의 강물을 따라 사는 사람은 네모진 마음을 지닌 이가 드물다. 흔히들 추억을 먹고산다는 표현처럼 추억을 중요시하는 이치고 성품이 삐뚤어지거나 개인주위로 치닫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추억을 소중히 아끼는 사람은 눈물이 많을 뿐 아니라 마음이 여려 이웃의 불행을 팔짱 끼고 방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의 영혼 속에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추억거리를 청명한 밤하늘 잔별처럼 무수히 심어주신 내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이가 추억만 먹어도 배불러 하는 단순한 성품으로 한세상 좋을시고 살아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