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竹♡수필

백수(白水)

松竹/김철이 2012. 6. 26. 13:45

 

백수(白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 중 지상의 가장 존귀한 선물은 세상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 땅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더 큰 선물은 세상 뭇 인간과 세상 모든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미물(微物) 같은 곤충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물이 없이는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철부지 아이들이야 물이 없으면 그 숱한 음료수 마시면 될 것 아니냐 하겠지만, 알고 보면 현대 과학으로 만들어 질듯 싶은 음료수나 주류마저도 물이 없이는 단 한 방울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지상엔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구사하는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분명하게 다른 계층의 68억이 훨씬 넘는 전 세계 인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셔야 사는 물의 양은 아마도 그 어떤 계산기로도 그 저울로도 계산할 수도 무게를 달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 물의 관계는 필수불멸(必須不滅)해야 할 존재일 것이다. 또한, 아무리 작은 생명을 지닌 생명체라 할지라도 물이 없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해 나아갈 수 없음은 자명(自明)한 터, 그렇다면 이 귀하고 소중한 물의 존재를 현대 과학문명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얼마큼 물을 귀하고 소중하게 다루고 있나를 살펴보면 솔직히 뭇 생명체 중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일컫기조차 부끄럽고 낯 뜨거운 현실 속에 숨 쉬며 살고 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세계 68억이 넘는 인구와 어를 나란히 견주기 위해 나라 살림이 더욱 부강해야 하고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많이 개발해야 한다는 핑계로 자손만대 보존하며 살아가라 하늘이 내려주신 천지의 대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破壞)하고 훼손(毁損)하니 말 못하는 물인들 어찌 견디겠는가?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터를 잡아 살고 싶어 했던 곳은 언제나 백수(白水)같이 맑고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고 항상 햇볕이 들며 통풍이 잘되는 곳이라 손꼽아 찾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순하기 그지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대자연과 늘 벗하며 생활할 수 있는 이러한 곳에 삶터를 일구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손 대대로 살기를 소망했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은 물에 대한 존귀함도 중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속에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파괴되고 훼손되다 못해 황톳빛 눈물을 절로 흘리며 비명을 질러 되도 자신만 잘살면 되고 자신의 눈앞 유익을 위해서는 자연이야 아무리 파괴되든 상관없다는 듯 자연을 아프게 하는 모습을 전국 곳곳에서 손쉽게 볼 수 있음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어느 지방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의 자연보호 홍보 방영을 시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이 돌아오려면 떠나간 철새가 돌아와야 하고, 철새가 돌아오려면 물방개가 돌아와야 하고, 물방개가 돌아오려면 송사리가 돌아와야 하고, 송사리가 돌아오려면 물벼룩이 돌아와야 하고, 물벼룩이 돌아오려면 강이 돌아와야 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 문구를 듣고 나니 과연 나 자신은 강이 죽어가는데 일조했던 일은 없었을까 어릴 적 벗하며 놀았던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의 대자연이 떠나갈 적에 그냥 무심히 방조하고 있진 않았나 하고 내 삶의 뒤언저리를 돌아다 보았다. 왜 없었겠는가? 산과 들의 허리가 잘려나가고 강과 개천이 똥물에 질식되어 죽어갈 적에 무신경하게 방조했고, 나 혼자일 테지 하며 무심히 버렸던 오물 몇 방울로 쓰레기 몇 조각으로 금수강산이 죽어가는 데에 일조했던 순간들이…

 

 불과 이삼십 년의 세월 동안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대자연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갖은 공업 폐수와 농약을 퍼붓고 중장비들로 산천의 살점을 마구 도려냈는데 이제 몇십 년이 지난 후에는 우린 어디로 갈까 우리는 세상 그 어디에 삶터를 잡아 살아갈까를 단 몇 분의 시간 동안만이라도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해본 이가 몇이나 될까? 내 어릴 적 우리나라 어디든 가더라도 물밑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냇물도 접할 수 있었고, 물속에서 생존하는 수초 한 포기 앙증맞은 꼬리를 절로 살랑대며 헤엄치는 갖은 민물고기도 쉽게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금수강산 어디를 가나 백수(白水)처럼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교통편이 그리 편리하지 못했던 그 시절엔 도보로 걸어서 볼일을 자주 보곤 했었는데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흐르는 냇물이나 개천물을 손으로 떠서 손쉽게 마실 수 있지 않았는가. 작년 봄 새로 이사한 집과 가까운 위치의 온천천이라고도 하고 일명 동강이라 부르는 천이 흐르는데 간혹 스케치를 겸해서 산책할 때면 아내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길 양이면 언어 없이 흐르며 속삭이는 물에 부끄럽고 미안하여 몸 둘 곳을 찾지 못할 때가 부직이 수다.

 

 간혹 왜가리로 느껴지는 굶주린 철새들도 만날 때도 있고 물을 따라 흐르다 실수로 유입된 것인지는 몰라도 악취가 코끝을 맴돌고 바로 눈 밑의 수질조차 눈으로 볼 수 없는 똥물 속을 헤엄치는 민물고기도 접할 때가 있는데 같은 대자연 속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인 그들에게서 놀이터를 빼앗고 통째 삶터를 앗아간 책임을 절실히 통감(痛感)하며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을 때가 많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하여도 동강에도 일급수에서 볼 수 있는 민물고기들이 평화로이 헤엄치며 노니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고, 온갖 철새가 날아들어 이웃한 사람들과 한가로운 여가를 즐기곤 했었다.

 

 온천천과 합류하여 수영만으로 흘러가며 온천천과 같은 물줄기인 수영강(水營江)이라 일컫는 수영천만 하여도 내 어릴 적 부친께선 한 달에 한 번 물때에 맞추어 수영강에서 민물게를 잡아오시곤 했었는데 가실 때마다 두 자루는 기본이고 많은 양의 민물게를 잡아오셔서 온 동네 이웃들과 나누어 게장을 담가 먹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만큼 물이 깨끗하니 강 주변에 갖은 생명체가 오염되지 않고 서식할 수 있었다고 증명해 주는 한 단면을 볼 수 있음이 아닌가? 아무리 산업현대화도 좋고 윤택하게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안고 있자고 보채지도 않았고, 업고 있자고 조르지도 않을 텐데 강(江)이나 개천(開川)에 절로 자생하는 생명체만은 제대로 숨 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체가 떠난 강물은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도 마실 수 없음을 깊이 인지(認知)하며 다시는 물의 진노를 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인간의 인두겁을 쓰고도 인간 구실을 못하고 사람 본연의 도리와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이라 칭한다. 사실 강과 하천이 이렇게까지 오염되고 훼손이 될 때까지 갖은 강과 하천이 이기적인 일부 인간들 탓에 몸살을 앓고 불치병에 걸려가고 있다는 현실을 지상보도나 수많은 입과 귀를 통해 전하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자신의 가족 자기네 가정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들의 배속만 잔뜩 채워온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생명수인 물에다 장난쳐온 그들의 생각을 맑은 물에 말끔히 씻어 말려주고, 싶고 그들의 배속에다 더도 덜도 말고 자신들이 그동안 대자연은 물론 온 국민이 마시고 공유해야 할 강이나 하천에다 무분별하게 버려온 오물과 똥물의 수량만큼만 채워주고 싶은 심정이다.

 

 눈이 있되 세상 원리를 보지 못하고 귀가 있되 진리의 말을 듣지 못하니 그들은 새로이 신설해야 할 특급 장애인일 게다. 또, 한 해 여름의 장마도 시작되었고 바람과 비를 동반한 수많은 태풍이 찾아올 텐데 강과 개천의 원주인인 버들치, 납자루, 동사리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불보다 무서운 물의 노여움에서 벗어나 세상 모든 사람이 옥수 같은 맑고 깨끗한 물을 마셔 한 점 티없는 인성을 지녔으면 하는 소망 묵묵히 흐르기만 하는 물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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