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두레박

[부산] 요한 14, 1-12.

松竹/김철이 2011. 5. 21. 13:51

[부산] 요한 14, 1-12./서공석 신부(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하신 다음, 그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죽음을 넘어 당신이 가신 저승으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떠나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셔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이 도달한 결론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는 말씀도 같은 결론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또 가르친 하느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성전의 제사의례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 생명의 기원이라 믿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행세하던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믿음이 옳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기에, 죽이는 인간의 힘이 그분을 말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초기 신앙인들은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로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에게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도 행복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나 권력을 좇아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과 더불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진 자녀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진리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본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말씀하셨다는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짧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갑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더 넓은 여건에서 새롭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새로운 실천을 하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배워서,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에 합당하게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을 넘어서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 안에 예수님을 살아계시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이 종교적 의무 수행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무수행을 위한 미사, 의무수행을 위한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의무수행을 요구하는 율법과 제도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불행도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 보셨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만든 법과 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곧 당신 생명의 기원으로 믿으셨습니다. 법과 제도를 강요하며 벌주시는 하느님을 믿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탈선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인간을 불쌍히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숙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이로운 것만 추구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손해도 보고, 희생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만을 위한 울타리 안에 갇혀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기도하고 수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자비로운 눈으로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분의 시선과 그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