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웰빙, 즉 ‘잘 존재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웰빙을 육체적·정신적 의미로 이해한다. 신앙인 중에도 신앙의 목적을 육신적·정신적 편안함에 두고 있는 이들이 많다. 물론 육신적·정신적 편안함도 중요하다. 육체가 편하지 않고 정신이 평화롭지 않으면 행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목적으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냉담하기 쉽다. 신앙은 육신적·정신적 편안함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 편안함이다. 영적인 차원의 편안함이 없다면 자아 완성이 불가능하다. 성덕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닮은꼴로는 더더욱 살아갈 수 없다.
성인들의 삶은 육신과 정신을 영(靈)의 지배하에 둔 삶이다. 영의 인도를 받는 정신, 영의 인도를 받는 육신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영이 중요하다.
성인들의 삶에선 내 뜻만 고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성인의 삶은 이웃의 뜻과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개방된 삶이었다. 초월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습성들에 메여있다. 이것을 과감히 떼어내야 한다.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유지할 때 초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의 삶은 어떻게 하면 영과 함께할 수 있을까.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자.
우선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느님과 합치(일치, congeniality)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쉽게 말해 합치란 ‘계속해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 계속해서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소명이 무엇인지, 나의 삶의 궁극적 소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융화(compatibiliyt)가 일어난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합치의 성향이 없으면 인간은 금방 욕심 부리게 되어 있다. 소유하고 싶고, 내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융화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도 이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합치와 융화로 정립하였다면 이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선 연민(compassion)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한계성이 있으니 언제나 서로에게 연민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합치, 융화, 연민이 있어야 세상을 향한 참된 인간 역량(competence)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하위성향 (보조성향)으로써 인정 개방성·초탈· 순명·단순함·외경·확고함·부드러움·사밀함 등의 성향들을 가꾸어 갈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향들이 깨달아 지고 체험될때마다 우리는 ‘경외’(Awe)를 체험하게 된다. 경외는 우리가 가진 모든 영적인 에너지들이 발휘 되는 절정의 순간이다. 경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에 대한 경탄이다. 동시에 하느님 뜻에 어긋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성인성녀의 삶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앞에서 말한 이러한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인성녀들의 삶은 왜 우리와 다른가. 왜 그분들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그분들이 앞에서 말한 형성의 원리에 따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 성녀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형성해 놓으신 내면의 영적 성향들을 파악하고 가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성인성녀의 삶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모범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성인성녀들의 내면에 있었던 영적 흐름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삶의 원리들을 보아야 한다. 앞으로의 작업은 이런 구도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