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진흙탕 속에서 핀 장미 7부/(소설)창작과 의식

松竹/김철이 2011. 3. 8. 14:46

병원 담당 의료진의 배려로 병원의 규칙을 어겨가며 임시 퇴원을 하게 된 준호는 소영의 집에 맡겨둔 요한을 사랑의 집으로 데려오게 하였고 소영과 옥희가 힘을 모아 정성껏 요한의 첫돌 상을 차려달라는 당부를 하였다. 마침내 하룻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갔고 정성껏 준비한 첫돌 상은 차려졌으며 알리지 않았음에도 평소 사랑의 집 가족들과 준호의 직계 가족들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던 주위의 이웃들이 찾아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혈육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는 요한의 첫돌을 맞았음에도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이 너무나 싫었던 준호, 아무런 실상을 모르는 채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요한의 해 밝은 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시간은 유수처럼 순식간에 흘러 한때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그날 오후가 되자 준호는 병원 의료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원 의료진이 특별히 보내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으며 잔치에 모였던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였다. 그날 오후 요한과 요한의 첫돌 잔치에 모였던 이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준호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 혼자 누워 창틈으로 세어 들어오는 창밖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이름 모를 한 쌍의 새, 그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한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혜정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준호와 혜정의 사이에 어떤 문제나 혜정과의 애정전선에 결코 금이 가서가 아니다. 혜정을 이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고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준호의 진정한 마음을 모르는 이들은 속 모르는 소리로 소리로 하기도 한다.

 

 “사랑하면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해야지, 왜 자식까지 낳았고 그렇게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혜정과 헤어진다는 것인가, 말도 되지 않는 괴변 늘어놓지 말라.”고.

 
 주위의 수많은 지탄도 따르겠지만 준호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의 고심은 혼자서 살을 저미는 듯 했을 것이다. 이 결심을 하기 전 혜정과 함께했던 지난 2년여의 숱한 애환으로 얼룩진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준호는 이런 생각을 내내 뜨거운 핏물 같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육신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1급 장애인이 단신으로 집에서 쫓겨나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죽음의 길목에서 구사일생으로 혜정을 만나 생을 이을 수 있었고 30여 년간 살아오면서 상상 조차할 수 없었던 이성간의 사랑도 하였으며 결혼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시간 속의 공간들이 었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 속에서 스스로 지워버려야 하고 상상하기조차 싫은 비참했던 지난날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려 하며 아들 요한과 피맺힌 이별을 해야 하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혜정의 병세가 호전되는 대로 자신의 결심을 얘기하기로 하고 한 편으로는 주위는 물론이거니와 마음을 정리해 나갔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혜정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혼자서 차분하게 정리해 나가고 있었으며 요한과의 이별 또한 준비해 가기 시작했다.

 

 한편,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요한과 자신의 모든 행복과 부귀와 맞바꾸어 얻은 남편 준호와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며 병원에서 퇴원할 그날만을 기다리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음으로 늘 기원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가고 있었고,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엄마의 젖 냄새나는 가슴에 안기어 젖 한 번 편안히 빨아볼 사이도 없이 병마에게 엄마를 넘겨준 채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손에서 자라야 했던 요한은 첫돌이 지난 지금은 제법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모든 삶의 행로를 의탁한 채 앞으로의 운명조차도 다 믿고 맡겼던 사랑의 집 모든 가족 또한 항해사 잃은 배처럼 방황하기 시작한 지 벌써 수개월, 혜정의 입원 이후 혜정의 대리인 역할을 옥희에게 주었지만, 혜정이 자신의 모든 것 희생하며 가족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와는 달리 집 안팎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거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병원에서 퇴원한 준호는 소영에게 요한을 데려오라고 하여 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여 따뜻한 아빠의 가슴으로 품어 안아줄 수는 없어도 그동안 못다 나눈 부자간의 정을 나누었고, 한점 티 없이 해맑은 동안을 내려다보면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자신이 했던 결심을 더욱 굳혔다.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준호가 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이 지나 아무런 연락도 없이 혜정이 불쑥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때늦은 점심을 하다 말고 갑작스레 혜정을 맞게 된 사랑의 집 가족들은 무척 놀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 가시가 곳곳에 일어난 마루로 올라선 혜정은 마치 오랜 세월 엄마 품을 떠나있던 철부지 어린아이가 엄마 품으로 달려들 듯 가족들의 수많은 시선도 아랑곳없이 휠체어에 앉아 그저 묵묵히 맞이해주는 준호의 깡마른 품으로 달려들었다. 너무나 반가이 달려드는 혜정의 태도와는 달리 준호의 행동은 헤여진 지 몇 달 만에 아내를 맞이하는 남편의 태도가 아닌 무척 차갑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냉랭하였다. 이에 조금 당황한 혜정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보! 저 반갑지 않아?”
“반갑지 않긴….”
“그런데 저를 대하는 당신 표정이 왜 그렇죠?”
“으응… 그, 그건 말이야….”
“???…”

“여보 당신께 무슨 일 있죠?”
“일은 무슨 일….”
“아뇨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요.”
“옥희씨! 맞죠?”
“무슨 일 있었죠?”
“언니! 집에선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모르겠어요.”
“여보!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글쎄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러는 거야….”
“아니에요. 전 당신 표정만 보아도 알아요.”
“요한 엄마 이러면 안 돼! 병원에서 이제 막 퇴원한 사람이 이러면 어떡해.”
“난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는데 만약에 당신이 또 잘못되면 난 어떻게 해.”
“그러니 제게 다 말씀해 주세요.어떤 일이던….”
“여보 제발 내 말 믿어줘. 아무 일 없었으니 말이야. 응?”
“요한 아빠!, 정말이죠? 믿어도 되죠?”
“암…. 믿어도 되지. 당신이 날 못 믿으면 난 어떡하라고.”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듯 혜정은 양쪽 어깨를 들썩이며 한동안 안도의 울음을 흐느껴 울었다. 혜정의 등을 쓸어주며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육신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를 속여야 하는 자신의 마음이 준호는 몸서리 처질 정도로 싫고 미웠다. 준호는 금방 이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듯한 오열을 꾹꾹 억눌러 참으며 퇴원한 기쁨을함께 하기로 하고는 옥희에게 사랑의 집 가족들과 조촐한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음식도 조금 장만하고 소영에게 전화를 걸어 요한도 데려오게 하였다. 몸은 비록 장애를 입어 자유롭지 못하지만, 잽싸기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옥희는 금세, 조촐한 잔칫상이 마련되었고 전화 연락을 받은 소영이 요한을 안은 채 급히 달려왔다.

 

 일 년 가까운 세월을 하늘이 맺어준 모정도 잊으며 살아야 했던 혜정은 요한을 부둥켜 안은 채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요한은 어린 기억으로 그리 짧지 않은 세월동안 헤어져 있었던 탓에 엄마의 모습과 이제 분유에 길들어져 젖내음 나는 엄마의 가슴팍 그리움마저 잊었는지 안아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혜정의 손을 뿌리치고는 소영의 품을 향하여 첫돌 박이 서툰 걸음을 옮겼다. 혜정은 하루종일 어떻게 하면 요한의 잃었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만 한 번 돌아선 어린 마음은 쉽지가 않았다.


 하루의 해가 서산마루로 넘어갈 무렵이 되자 요한의 마음은 한층 더 처녀인 소영의 품속으로만 파고들었으며 이러한 혜정의 애처로운 몸부림은 보는 이들의 심정마저 안타깝게 하였다. 웃을 수 없는 광경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던
미어지고 미어지는 준호의 마음은 더욱 아프기만 했다. 마치 매미가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단 1초의 시간도 소영의 품에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요한,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한 혜정은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요한을 소영의 품에 안기어 돌려세워야만 했다.

 

 혜정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엄마 자리를 채워 제대로 엄마의 본분을 다하며 이젠 자신의 가정과 사랑의 집 모든 가족들에게 그동안 쏟지 못했던 정성과 사랑을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실망시켜 주지 않는 삶을 살리라 굳게 결심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라지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요한에게 외면을 당했다는 슬픔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엄마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빠진 채 하룻밤을 하얗게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모정에 못지않은 준호 역시 요한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프기만 한데 자식을 잃은 듯한  혜정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이럴 때 몸이라도 성하여 마음대로 술이라도 마실 수 있어 만취하여 깊은 잠이라도 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음이었다. 그래서 일순 이 짙은 괴로움을 잊고자 했다만 역시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생의 걸림돌이었다. 때가 있을 때마다 사랑의 집으로 봉사를 나온 이들이나 언론매체의 발언대에 서는 비장애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장애가 있다는 것은 실생활에 조금 불편할 뿐이지 결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장애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은, 단순히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의 처지를 동정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일 뿐이다. 장애인들의 아픔, 그 고통도 모르는 채 그냥 상투적으로 흘러가는 말로
순간 장애인들의 기분을 맞추어주기 위한 허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하룻밤의 긴 시간이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밤을 지새운 준호와 혜정은 날이 밝자 사랑의 집 모든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 혜정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어수선했던 집 안팎 분위기를 쇄신하려 가족회를 열었는데, 준호는 가족들에게 사랑의 집 실질적인 관리인은 자신이 아니라 혜정이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은근히 주입시키려는 말투로 인사말을 시작하였다.

 

“숱한 역경과 힘겨운 삶 속에서도 저와 제 아내를 의지하며 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사랑하는 사랑의 집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헌신적인 기도와 희생 덕분에 오늘날의 사랑의 집이 이만큼이나 성장하여 이제는 누구의 도움없이도 우리만의 힘과 노력으로 어떤 역경과 시련의 풍파가 우리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하여도 능히 헤쳐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제 아내도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니 더 낳은 우리들의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경거망동하는 행동은 결코 없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랑의 집 모든 가족이 하나가 되어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감싸안으며 온 가족의 일치 됨을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준호의 인사말이 끝나자 그동안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들로 소심증에 빠져있던 사랑의 가족들은 손바닥이 부르터라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언제까지나 기쁨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준호의 인사말이 끝난 뒤 방으로 들어온 혜정은 감회가 새로운 듯 방안을 휘이-, 한 번 돌아보며 요한의 일이 떠올라 또 다시 골똘한 생각에 빠진다. 그즈음 준호가 한 가족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밀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여보! 당신 요한의 일을 생각하는구려.”
“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질 않아요.”
“왜 안 그렇겠소.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준 자식인데 함께 생활하면서 얼굴을 익히다 보면 차츰 나아지리라 보오.”

 혜정은 아무 말하지 못한 채 준호의 휠체어 팔 판을 가볍게 짚으며 무릎을 꿇는다. 준호는 이럴 때 손이라도 성했던들 마음 아파하는 혜정을 감싸 안아줄지 못함이 속으로 가슴을 친다. 하루를 아무런 하는 일 없이 해가 저물었고 또다시 하루의 밤은 까맣게 익어만 갔다.

 다음 날 아침, 혜정은 모든 일들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하고자 가장 먼저 기도를 바치려고 제대 앞에 두 무릎을 조아려 꿇었다. 한참 동안 모든 신심을 집중하여 기도에 전념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뜨거운 봇물같은 눈물이 미끄러지듯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혜정은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어 계속해서 기도를 바치려 하였으나 한 번 흐트러진 기도 정신을 되찾을 길 없어 막 일어서려는 그때였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는가 싶더니 소영이 요한을 품에 안은 채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다본 혜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저께만 하여도 소영의 품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던 요한이 아닌가, 그런데 어설픈 걸음으로 아장거리며 혜정의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순간 혜정은 뛸 듯이 기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요한을 품에 덥석 안았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이틀 전만 하여도 엄마를 모른 채 하여 그렇게 애를 태우게 하던 요한이 웬일인지 오늘은 혜정의 품에 안겨서도 울기는커녕 생글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가릴 사이도 없이 혜정은 자신의 품속에 요한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파묻어 실로 오랜만에 모자간의 뜨거운 해후를 하며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요한이 어떻게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그렇게도 싫어하며 안기려 하지 않던 혜정의 품에 그것도 하루아침에 안기게 된 것인지 이유는 알 순 없지만, 그 이유야 어디에 있든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을 갔고 싶지 않았다. 단지 요한과 단둘이 한자리에 할 수 있고 요한을 품에 안을 수 있음에 혜정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기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무것도 떠올리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날 혜정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도 모든 일에서 손을 접고 요한을 품에 안은 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직 요한을 얼리고 달래는 일에만 온 신경을 다 쏟았다. 단 한 순간도 혜정이나 다른 이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준호는 온 종일 꼼짝하지않고 방안에서 요한과 지내는 혜정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음에 혜정이 한시라도 빨리 요한과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크게는 요한의 집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일들을 처리 해야 할 안주인으로, 적게는 준호의 아내와 요한의 엄마로서의 그 역할을 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였다. 오죽했으면 저러랴 하는 생각을 하니 혜정의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 혜정과 요한이 있는 방문 앞까지 왔다간 휠체어 바퀴를 되돌리곤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혜정이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준호는 물론 엄마의 젖가슴이 살이 에이도록 그리웠던 요한을 비롯한 모든 장애인 가족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며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기를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한 눈에 느껴졌다.
사랑의 집을 외면에서 바라볼 때는 혜정이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 평온한 것 같았으나, 어느 한순간만 방심하고 마음을 놓으면 반드시 어떤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꽃을 피우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사랑의 집 안에서 지켜본 시야에선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한 부모 슬하에 피를 타고 살을 타서 태어난 친형제들도 자신들의 이익과 편안을 위해선 언제 봤냐는 듯이 배신을 하고 안면을 몰수하는 세상인데 전혀 낯선 이들이 모여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집 가족들이야 오직 하겠는가, 불행의 씨앗은 이미 혜정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부터 싹을 피우기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머리아픈 일들 때문에 잠시 기억 속에서 방치해 두었던 일이 때가 온 듯 그 악의 고개를 조금씩 치켜들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들일수록 서로 손과 발이 되어 손발이 성한 이들은 손과 발이 성치 못한 이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어야 하고 정신이 맑고 또렷한 이들은 비록 손과 발은 성하나, 정신이 맑지 못한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모든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임이 분명한데 비록 손발과 정신은 성치 못하다 하여도 오감을 지닌 인간인지라 선보다 악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음이 틀림이 없었다. 혜정이 병원에 입원하기 몇 년 전, 혜정이 일 많은 사랑의 집 안팎의 일들을 돌보느라 준호를 돌볼 수 없을 때 준호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영식이라는 정신지체 1급 장애인 가족을 데려온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영식이가 사랑의 집으로 들어올 때 어느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던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오게 된 것이고 당시 그 여인의 말로는 영식은 어릴 적 부모가 화재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삼촌 댁에서 지내었는데 누군가 눈치를 주지 않아도 자격지심에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 구박하고 천대하며 살고 있다기에 그렇지 않아도 틈틈이 준호를 돌봐줄 손발을 구한다던 혜정의 부탁도 있고 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사랑의 집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호의 손과 발이 되게 해 주고 눈치 보지 않고 배부르게 밥이나 마음 놓고 먹게 해 주라고 하여 가족들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으로 가족들의 성품과 장애별 특성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준호를 정성을 다해 돌볼 수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손이 빌 때마다 준호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고 있었던 혜정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앞뒤 생각할 여지도 없이 영식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혜정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 옥희를 도와 준호를 돌보는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의 손길도 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조그마한 일이 아무도 상상조차 못할 큰 불화의 씨앗으로 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살이가 아무리 각박해지고 민심이 흉융해진 세상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고 비 오지 않는 날의 날벼라도 유분수지 어릴 적 화재로 세상을 떠나셨다던 영식의 부모가 두 눈 멀쩡히 뜬 채 찾아온 것이다. 영식이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정신지체 장애인이라 하여도 사랑의 집으로 들어올 당시 몇 차례나 묻고 또 물어도 부모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했었다. 아침식사를 하던 사랑의 가족들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에 모두 제정신을 잃은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준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영식이 부모님 되십니까?”
“아니, 그럼 지금 우리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이요? 세상에 이러는 법은 없어요.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해도 사람을 이런 대접을 하면 안되지!”
“아니 저희가 어쨌기에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죠. 비록 호의호식은 하지 못하여도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의지할 형제나 일가친척 한 사람 없다기에 함께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어느 천벌 받을 놈이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어미 애비를 죽고 없다고 했누! 그게 누구야 도대체?”
“영식이 둘째 삼촌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삼촌? 이 아이에게 삼촌이라면 내겐 동생이 되는데 내겐 동생이 없어!”
“네엣!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내겐 동생이라곤 광주에 사는 누이동생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럴리가요?”
“내 말이 그리 믿기지 않으면 광주에 사는 내 누이더러 호적등본을 떼어 오라고 해서 확인하면 될 것 아냐! 그렇게 하겠어? 지금 당장 전화해서 올라오라고 할까?”
“이러시지 말고 영식이를 데려가시면 되잖습니까.”
“뭐라고!?”

 

 

 영식의 어머니라는 이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가끔 불안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반면에 아버지라는 노인의 태도는 너무도 당당했고 때로는 깡마른 얼굴에 살기마저 감돌아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괜히 몸이 움츠려지던 준호는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는 땅을 향해 떨구고 있었다.  몸통은 휠체어 안장을 뚫고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이 노인의 기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지기만 했다.  

 “아니, 아무리 병신이라 해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몸종 부리듯 했으면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라도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오히려 빠득빠득 대들다니? 생각 같아선 경찰에 고발을 해서 세상에 두 번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고싶지만, 그래도 이 아이에게 10년이란 세월을 밥술이라도 먹게 해 주었으니 이 정도로 참는 거니 그런 줄 알고 그만한 보상을 해야지.”
“아니, 영식이 아버님! 그냥 듣고 있자니 좀 전부터 자꾸만 10년 10년 하시는데 무엇이 10년이란 말입니까? 영식이가 우리 집에 온 지가 10년이란 말씀이세요?”
“그럼, 아닌가?”
“아직 모르시고 계시는군요.”
“우리가 뭘 몰라, 이미 알아볼 만큼 다 알아보고 왔으니 속일 생각 마!”
“제가 어르신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차근차근 들어보시죠, 그렇게 흥분만 하지 마시고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려는지 몰라도….
애당초 우릴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네, 잘 알았습니다. 후~ 그러니까 우리 사랑의 집 가족들이 이렇게 모여 살게 된 지는 정확히 올해로부터 6년 전의 일이고요. 영식이가 우리 집으로 온 지는 꼭 3년 6개월 되었습니다.”  
“뭐! 6년이 어쩌고 3년이 어째!”  
“정말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 집을 설립할 당시 기록해 두었던 서류도 있고 영식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올 당시, 나중의 일을 생각해서 영식이를 데려온 아주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영식이를 데려온 날짜와 영식이 삼촌이라는 분의 각서, 즉 앞으로 영식이의 모든 일에 대해 관여치 않겠다는 친필 각서를 원본은 따로 두고, 복사한 사본은 영식이 삼촌께 갔다 드리라며 그 아주머니께 드렸답니다.”
“그걸 지금 날 보고 믿으라고!?”
“그 각서는 이웃에 살던 경찰관 입회하에 복사를 하였기에 속일 수가 없답니다.”  
“너희끼리 다 짜고 하는 수작을 나더러 믿으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 경찰을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밝힌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뭐! 경찰?”

 경찰이라는 준호의 한 마디에 서슬이 시퍼러게 날뛰던 영식이 아버지라던 노인의 태도는 점차 고개를 숙이는 듯하더니 잠시 후 더욱 거칠어졌다.

 

“경찰? 좋지! 불러, 빨리 불러! 병신이라서 다소곳하게 나오면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먼, 병신 값 한다던 옛말이 있다더니 그 말이 맞네. 그랴!”
“뭐라구요! 병신요?”

 

  병신이란 한 마디에 지금껏 조용히 오가는 말들을 듣고만 있던 혜정이 부르르 떨며 일어선 것이다.
 
“그래, 병신이라 했다 왜? 병신을 병신이라 부른 게 잘못이냐? 이것들이 가만 보니 안팎으로 경우라곤 손톱만큼도 없구먼, 어른에게 버릇없이…
너희는 어미 에비도 없느냐!”
“네. 어르신 저희는 부모도 없는 고아들이랍니다.”

 

 혜정이 부모란 말에 눈물을 흘리며 분노를 토한다. 준호와 연을 맺을 때 부모님이 살아생전이어도 이미 오래전 돌아가신 걸로 여기고 살아갈 것이라 굳게 결심한 바 있고 4남매 막내딸로 어느 형제들보다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많이 받았던 터라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기에 터져 나오는 분노 또한 걷잡을 수 없었다.

 

 “어르신 해도 해도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어르신께서 정말 영식씨 아버님이시라면 이러실 순 없습니다. 조금 덜하고 더하다 뿐이지 영식씨나 제 남편이나 다 같은 처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입에도 담기조차 부끄러운 병신이란 말씀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실 수가 있답니까? 흑흑흑….”  
“눈물로 동정 따윈 구걸하려 들지 마!”
“구걸요!?”
“그래 구걸, 구걸이 아니면 뭐야!”

 

 구걸이란 두 단어가 억누르고 있던 준호의 태산 같은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살점보다 아니, 자신의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의 피눈물보다 더 짙은 눈물을 보니 마음이 아파 찢어질 것만 같은데 구걸이란 말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준호는 휠체어에 의지하여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몸을 마치 용수철이 튕기듯 휠체어 밖으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온 것이다. 순간,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고 휠체어에서 튕겨져 나온 준호는 손발도 의지대로 쓰지 못하는 몸을 던져 노인에게 달려든 것이고 노인은 잽사게 피해버린 것이다. 돌발적인 준호의 행동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혜정이었고 혜정은 마치 생선 토막이 물도 없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준호를 쏜살같이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다.


 

“요한 아빠! 괜찮아요?” 

“난 괜찮아”
“왜 그랬어요. 흑흑흑….”
“난 다른 어떤 수모도 다 참아 넘길 수 있어도 구걸이란 말엔 참을 수 없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단 말이야. 당신도 잘 알잖아.” “네, 알아요.“

 

 서로 한 몸이 되어 부둥켜 안은 채 한없이 흐느끼는 준호와 혜정을 바라보던 주위의 눈들도 숙연했다. 한동안 소란이 계속되는 동안 이웃에 거주하는 이들이 하나 둘 모이다 보니 사랑의 집 안팎은 소란을 구경하려는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준호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잠시 시들어졌던 노인은 구경꾼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자 내심 기회를 잡았다는 듯 한층 더 목청을 높여 기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경우 없고 본데없는 것들을 봤나! 병신 주제에 아래위도 모르고 어른을 치려고 덤벼들다니,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어르신! 어른이면 어른다운 행동을 보이셔야 어른 대접을 받는 법 아닌가요?”
“뭐야!? 내가 어른다지 못한 게 뭔데!”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젠, 다 싫어 천금을 준다고 해도 다 싫단 말이야!”
“네, 그러시다면 영식일 데려가시면 되겠네요.
“정말이지?” 
“네, 정말이고 말고요.” 
“이렇게까지 심한 멸시와 무시를 당하고도 영식이를 데리고 있을 생각 없습니다. 데려가십시오.”
“그럼, 그동안 우리 영식이를 몸종처럼 부려 먹은 보상은 해줘야지.”
“이제서야 어르신의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본색이라니?”
“좀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영식이를 데려올 때 삼촌이라는 분과 각서를 주고받았고, 또 어르신이 정말 영식이의 아버님이시라 치더라도 지금은 보상해 드릴 방법이 없답니다.”
“이제 와서 베짱이냐!”
“베짱이 아니라 지금 저희 집 형편이 좀 어려운 실정이고, 그렇다고 해서 제게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고요.”
“설마 나더러 이대로 그냥 몇 년 동안 몸종 노릇을 한 불쌍한 아들놈을 데리고 가란 말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믿기진 않지만 어르신께서 영식이가 아드님이라 하시니 그렇게 믿고 영식이를 데려가시되, 형편이 좀 나아지는대로 성의를 표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며칠까지 오면 돈을 줄 수 있지?”  
“그 약속은 제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돈이 생길 때까지 여기서 함께 지내기라도 하란 말이야!”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수 없지 뭐, 내키진 않지만 돈이 마련될 때까지 며칠 이곳에서 묵는 수밖에….”

 생각 같아선 당장 경찰을 불러 영식 친부의 여부를 가리고 싶었지만, 열에 하나 노인이 영식의 친부가 맞는다면 비록 정신은 온전치 못하여도 그래도 몇 년 동안 자신의 수족 구실을 하면서 한가족처럼 지내온 영식에게 예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준호가 노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고 그 덕에 노인은 돈이 마련될 때까지 라는 핑계하에 사랑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런 소란이 일어난 후 언 열흘이 넘는 시간을 영식의 부모라 자칭하는 노부부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들은 많은 불편함을 겪어야만 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사랑의 집 안에서만이라도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게 해 주라는 준호의 말에 따라 혜정은 물론 어느 누구라도 사랑의 집 장애우들을 구속하는 일은 없었는데, 노부부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한 가지 한 가지 간섭이요, 하나하나 투정을 부리는 통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혜정이 요한을 데리고 잠시 이웃 동네에 있는 장애인 시설로 견학 겸 도움을 청하려 다녀온 사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혜정이 외출을 하여 집을 비울 때면 옥희가 혜정의 대리인 역할을 해 왔던 터라 옥희가 점심을 준비하려고 주방에 들어서니 주방 바닥은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장애인 가족들에게 주라고 봉사자들이 보내온 갖가지 음식을 다 꺼내놓고는 일부 흥청망청 먹어가며 노부부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옥희는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평소 혜정이 한 가지라도 더 아끼고 절약하여 장애인 가족들에게 먹이려고 자신의 남편인 준호에게 주지 않고 소중하게 넣어두었던 음식들을 어느 누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마음대로 꺼내어 먹고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깜짝이야! 왜 그랴?” 
“왜 그러다뇨? 보면 모르세요!” 
“뭘?”  
“음식을 이렇게 함부로 드시면 어떡해요!”
“아니.. 왜? 이 음식들은 먹으면 안되는겨?” 
“안되죠!”
“왜 안돼는겨?”  
“이 음식들은 우리 장애우 식구들에게 먹이려고 혜정 언니랑 준호 오빠도 잘 드시지 않는 거란 말이에요!”  
“별꼴이네, 아무나 먹으면 되지. 치사하게 먹는 것 가지고 사람차별이야. 그리고 너! 좀 전에부터 우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랴! 계집애가 버릇없이….”  

“지금 제가 큰 소리 안 나오게 돼 있어요!”
“너무 그러지 마 그러는 거 아녀.”
“할머니도 참 딱하세요.”  

“뭐가 딱햐?”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리려다 참았는데요.”
“뭔지 야그 혀봐, 들어볼텐께.”
“할머니 아들인 영식이도 오갈 곳이 없다며 그저 눈치 안 보고 밥이나 배불리 먹게 해 주면 고맙겠다 하여 오게 하였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마저 이렇게 오셔서 생떼를 쓰시니 준호 오빠랑 혜정 언니가 무슨 죄인이에요!?”  
“뭐! 생떼?”
“생떼가 아님 뭐에요!”
“이 놈의 계집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계집애라뇨! 입이 그저 터졌다고 말을 막 하는 거 아냐! 할아버지 제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씀해 보세요!”
“너, 자꾸 날 화나게 만들래! 좀 전부터 듣고 있자니 말을 함부로 해! 너, 자꾸 그러면 내게 맞는다!”  
“네엣! 제가 맞아요? 어머어머 귀가 막혀! 때리려면 때려보세요 제가 가만 있는가.” 
“네가 가만 안 있으면 어쩌겠단 말이야! 병신주제에….”
“병신?”  
“그래 병신,”   

 순간, 병신이란 말에 옥희는 앞뒤 안 가리고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채 목놓아 통곡하고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때려요! 때려!”  
“이게 때리려면 못 때릴 줄 알고! 에잇!”  
“할아버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노인이 바닥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던 술병을 집어 옥희를 향해 내려치려는 순간 외출했다 돌아온 혜정의 눈에 그 어처구니없는 광란이 들어온 것이다. 
 

“할아버지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리고 왜 말끝마다 병신이에요! 병신이 따로 있는 줄 아세요! 병신은 이 사람들이 아니라 저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육신이 성하면서도 정신이 썩어있는 사람들이 진짜 병신이 아닌가요? 할아버지 꼭 이렇게 사셔야 합니까? 정말 불쌍해서 눈뜨고는 못 보겠군요. 저 역시 부산에 두 분처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기에 저희 아기 아빠와 다투실 때도 나서려 하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너무 하시군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는 다 드러난 거 아닌가요? 두 분께선 자식인 영식 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고, 원하시는 건 한 가지, 돈이 아니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  

 혜정의 질책같은 말이 쉴 새 없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노부부는 한마디 말도 못한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외면하고 마시던 술잔만 연이어 마셨다. 혜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흥분하여 요한을 등에 업은 채 열변을 쏟아냈고 등에 업혀 자고 있던 요한은 놀라 잠을 깨어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혜정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흐느끼는 옥희에게로 황급히 달려가 덥석 끌어안는다. 

“옥희야! 괜찮니?”  
“으응~ 언니”  
“다친 곳은 없어?”  

“응, 없어”
“다행이네, 조금만 더 참지 그랬어.”
“나도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이야? 툭하면 병신 병신 하게. 정말 사람들이 싫어.”
 

그때 준호가 영식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지하여 주방으로 들어서다가 어처구니없는 광란의 장을 보게 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준호는 노부부를 향해 고개 돌려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주세요!”  
“나갈 테니 돈만 내놔!”  
“제게 돈 맡겨두셨습니까!”  
“네가 준다고 했잖아….”
“네, 드린다고 했지요.”  
“그럼 줘야지.”
“사람이라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 면에 있어 어르신께선 지금 잘못된 길로 잘못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뭐! 내가 왜?”  
“제가 어르신께 돈을 드리겠다고 했던 것은, 제가 어르신께 빚을 졌던 것도 아니고, 더욱더 제 아내가 어르신께 돈을 빌린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들인 영식 이를 찾아 먼 길을 오셨기에 또 제가 몇 년 동안 영식 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었기에 영식이를 생각해서 돈을 드리려고 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르신께선 마치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것처럼 생떼를 쓰시니 더 이상 저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젠 하는 수 없이 법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하자니까?”  

 다툼이 없이 순리적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노부부가 말이 통하지 않는 통에 법적인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경찰을 부르기로 하고 방으로 들어간 준호는 깊은 생각에 빠져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등을 툭!~ 하고 쳐서 돌아다보니 영식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영식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준호에게 얘기하려는 듯 비장한 결심을 하고 온 것처럼 보였다.

“영식아, 왜 그래?”  
“저어….”
“뭔데 말해봐”
“있지….”
“그래”
“아까 그 사람….”
“그 사람이라니, 그 사람이 누군데?”  
“좀 아까 옥희 누나랑 으응…. 혜정 누나랑 싸운 사람”
“아버지? 어머니?”  
“으~응….”
“영식아! 아버지 어머니더러 그 사람이 뭐냐.”  
“그 사람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아니다.”
“아니라니?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 우리 외삼촌 외숙모다.”  
“정말?”  
“그래 정말”
“그럼 어떻게 해서 너네 외삼촌 외숙모님이 부모님이라 우기시는지 자세히 내게 얘기해 줄래?”
“응….”

 저능아로서 평소에 조금은 정신연령이 부족하지만 또 어떨 땐 맑은 정신이 들 때면 누구보다 바른말만해 왔던 영식인지라 영식의 정신이 다시 흐려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 외삼촌, 외숙모가 양친 부모로 변신했는지 영식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로 한 준호는 그 누구도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영식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자, 우리 영식이는 착해서 거짓말 안 하지?”
“응, 거짓말 안 해”
“그럼 지금부터 왜 외삼촌과 외숙모님이 영식이 부모님이 되어야 했는지 얘기해줘.”
“으~응, 있지 그게 말이야.”
“응, 말해봐 천천히….”
“그게 내가 몇 살 때인지는 몰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어느 날, 밭일로 심히 피곤하여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데 전기 누전으로 큰불이 났고 아버지 어머닌 그때 다 돌아가셨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요행히 나만 빠져나오게 된 거야.”
“쯧쯧 우리 영식이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 뒤로 갈 곳이 없어진 난 작은 외삼촌 집으로 가야 했고, 작은 외삼촌 집에서 스무 살까지 살다가 둘째 친삼촌 집에서 살았는데 둘째 삼촌네가 워낙 가난했고 삼촌이 늘 아파서 일을 못해 숙모가 막일을 해서 먹고살다가 너무 힘이 들어 입 하나라도 줄여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이곳으로 오겠다고 했던 거야.”
“그런데 왜 밖에 계신 외삼촌께선 영식일 자기 아들이라고 하시지?”  
“으응~ 그건 말이야, 내가 외삼촌 집에 살 때 외삼촌이 나더러 아들 하자고 했거던?”
“그래서?”
“그런데 잘 살던 외삼촌이 하고 있던 장사가 잘되지 않아 내가 친삼촌 집으로 갈 때, 외삼촌이 삼촌더러 몇 년을 당신 핏줄을 먹여 살렸으니 돈을 좀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영식이도 못 데리고 계셔서 우리 집에 보내신 삼촌께서 무슨 돈이 있다고?”
“그 당시엔 삼촌네도 살림이 풍족한 편이었거던.”
“아, 그랬었구나.”
“그런데도 삼촌이 외삼촌에게 돈을 주지 않자 두 사람이 크게 다투었고, 그 후 삼촌네도 살림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삼촌마저 몸져눕게 되었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사람처럼 천방지축으로 사는 줄 알았던 영식이 준호와 대화를 하는 동안 세상 누구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대화에 임했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생각이 들었던지 급기야 뜨거운 눈물마저 하염없이 흘리는 것이었다. 사랑의 집 장애인 가족이라면 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긴 하지만, 준호는 그동안 가족들에게 공평하고 평등한 사랑을 주려고 애써 왔었어도 속으로는 영식을 누구보다 더 아끼고 사랑해 왔었기에 영식의 뜨거운 눈물 앞에선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성인이지만 성인답지 않은 해맑은 영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준호와 영식의 대화는 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들뜬 벌집처럼 소란을 일으킨 이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몇 시간 전 준호가 혜정에게 영식이 외삼촌 부부의 문제를 순리적이 아닌, 경찰을 개입시켜 법적으로 시비를 가르자 했기에 준호의 어떤 말이 있기 전까진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영식이 너무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통에 두 사이의 대화는 잠시 끊어진 방안 분위기는 조금은 어색하기까지 했는데 이 분위기를 좀 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려고 말문을 연다.

“영식아! 그만 울어.”
“으흑흑….”
“우리 하던 말은 끝을 맺어야지.”
“근데 눈물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나와.”
“그럴 거야, 그래도 이젠 그만 울자 응?”
“으응”
“그래, 그래야지. 아까 하던 얘긴데 너네! 외삼촌 말이야.”
“응”  
“법적으로 널 친자라고 우길만한 근거가 있어?”  
“응, 있어.”  
“뭐! 있다고?”  
“응, 있어.”
“그게 뭔데?”  
“내가 외삼촌댁으로 갈 무렵 외삼촌이 삼촌에게 날 당신 호적에 올릴테니 다음에 어떤 경우가 생긴다 하더라도 혈육으로서 나서지 말라고 하면서 영식인 외 조카가 아닌 친자식으로 잘 키울테니 아무런 걱정 말라. 그 후 하시던 일도 마음대로 잘 안 되고 가세도 기울자 아무런 의욕도 없이 날이면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냈지. 그러더니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어.”  
“어떻게?”  
“으응, 눈만 뜨면 돈타령이야.”
“그래….”
“그런데다 날 귀찮아 여기더니 마침내 삼촌에게 날 데려가라고 하더군.”  
“…. ….”
“그것도 그냥 데려가라는 것이 아니라 여태 날 데리고 살면서 생활비를 포함해서 많은 돈이 들어갔으니 그 돈을 내놓으라는 거야.”  
“그래서 삼촌께선 돈을 주셨니?”  
“줬지.”
“얼마나?”  
“그 당시만 하여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어. 결국 삼촌은 외삼촌이 요구한 액수의 돈에서 절반으로 타협을 보고 날 데려갔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에게 무슨 돈을 달라 시는 거야?”  
“그건 말이야 어제 나랑 잠시 얘기해 보았는데 그 당시 외삼촌이 달라고 요구했던 액수에서 삼촌이 절반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내가 이곳으로 올 당시 삼촌이 혈육으로서의 아무런 권리도 행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으니 지금 날 데리고 있는 형이 나머지 그 돈을 내놓으라는 거지.”

영식의 말을 다 듣고 난 준호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고, 이젠 영식의 외삼촌 내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순리적으로 해결할 것인가를 고심해야만 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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