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추억(追憶)/수필 (월간 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09. 7. 14. 14:57

인간을 가리켜 추억을 뜯어 먹으며 사는 동물이고 한편, 추억을 되새김질할 줄도 모르고 굳이 기억해낼 아름다운 추억이 없다고 말하는 자 또, 불행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 여정에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에 생겨난 추억들을 애써 소명시키려 하는 자 자신에게 추억이란 지우개로 종이에 글을 지우듯 지울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말끔히 지우고 싶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을 가리켜 감정이 없는 동물이라 한다. 추억을 부정 시 여기는 이들의 상황에 서면 그들이 왜 본인의 생을 거쳐 흘러간 세월에 대하여 몸서리를 치는지 그리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태어나 가난한 서민층 가정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각에 행복하다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과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분명히 내 인생에 부여된 삶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내 세상이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며 살았으니
충분히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가 없었다면 다가올 미래는 분명히 있을 수 없기에 지나치게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던가 지난날들의 아픈 상처 때문에 과거의 나쁜 악습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표출되어 주위 사람들을 불편케 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순간처럼 스쳐갈 세월 속에 몇 점 아름다운 추억의 일기장을 나름대로 꾸며놓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났다지만, 이 세상도 힘들기로 맞장을 뜬다면 저승 못지않은 것이 사실이니만큼 힘겨운 세상 살다가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추억의 일기장을 한 장씩 넘겨가면서 좋은 일도 있을 테고 나쁜 일도 있을 테지만, 그 숱한 일들 속에 분명히 반성할 점도 있을 테고 참새 날개처럼 수많은 나날 속에 분명히 잘 살았다 찬사받을 일들도 많을 테니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모습과 모양이 별반 다른 이가 없을 것이지만,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함께 숨도 쉬고 늘 함께 생활하는 추억이 아닐까 싶다. 세월이 흐름에 나이도 먹고 몸도 늙어가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 먹물 같았던 머리는 백발로 퇴색되어 가고 팽팽했던 얼굴에 주름이 져도 유독, 나이는 물론 먹지않고 몸도 늙지 않고 몇십 년, 몇백 년 세월이 흘러가도 늘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추억 속의 나와 내 주위의 모든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소중한 존재건 소중한 존재가 아닌 인생살이에서 걸리적거리는 존재라 하여도 이 모두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당사자들의 몫이고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몫이라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잘 쓰는 표현처럼 내게 주어진 몫이 그랬고 주어진 생활이 그랬기에 마음 놓고 한번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을 수도 없었고 웃으면서도 반대편 마음을 생각해야 하는 삶이었고 때로는 가슴을 갈가리 찢어 발 시 놓고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어 눈을 씻고 두리번거려 살펴보아도 정녕 마음 편히 눈물 쏟아놓을 곳조차 찾지 못해 무슨 놈의 팔자가 시원하게 한번 울 수도 없냐며 투 덜된 적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 곰곰이 되새김질해보면 그때가 아름다웠고 그 시절이 내 생에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고작 해야 반평생인데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여겨지는 내 인생 속 추억의 일기장엔 갈피갈피 아픔이요, 눈물이라 누군가에게 대신 걸어달라 손을 모으면 말이 땅에 떨어져 흙 고름이 묻기도 전에 천 리이고 만 리이고 숨 한번 쉬지 않고 달아나 버릴 테지만, 그 숱한 고통과 시련을 지어주었을 때는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기에 내게 주어진 몫이라 여기며 지금 난 감히 세상을 지어낸 이에게 고한다. 난 당신께 선택된 자라고 오늘날까지 반평생을 해와 달과 번갈아 가며 동고동락해 왔었지만, 내 기억 속 추억은 분명하게 5등분으로 나누어져 기록돼 있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지금부터 그 5등분의 삶을 해부하여 다가올 내 생의 미래에 토양으로 삼고자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10대에는 그야말로 인생의 암흑기라 여겨진다. 한참 예쁜 짓을 하며 갖은 재롱 다 떨어 부모님을 순간이나마 기쁘게 해 드려야 할 나이엔 다른 아이들 아장거리며 걸음마 연습에 열중인데 난 돌아눕고 싶어도 뒹굴 수가 없어 제대로 한번 돌아눕지 못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아버님께서 본디 벗과 술을 좋아하셨던 터라 집으로 술벗이 찾아오실 때가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 손맛을 겸한 술상이 정성스레 차려졌고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흥이 고조되어갈 무렵이면 반드시 치러야 할 절차가 있었다. 그것은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어 번갈아가며 노래를 한 가락씩 뽑아내는 것이었다. 요즈음에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 어른들은 어찌 그렇게도 흥이 많았던지 흔히들 말하는 젓가락 장단만 하여도 그렇다. 요즈음 사람들 누구 하나 쉽게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특히 아버님은 본래 끼가 많고 한이 많으셔서 그런지 몰라도 젓가락 장단으로 고 남인수 선생을 비롯하여
고 진방남 선생, 그리고 아직 생존에 계신 걸로 아는 손인호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실 적엔 같은 남성인 내가 지금 느껴도 환상적이라 생각되는데 그 당시 아버님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여성들이야 오직 했겠나 싶다. 현대인들의 음주문화야 현대화 기계화로 반전하여 술을 마시고 싶으면 소줏집 호프집 골라가며 마실 수 있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 부르면 되지만, 시대가 시대이고 시절이 시절인 만큼 그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촌스럽기 그지없는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10대 중반에 겪었던 한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 채 가슴이 아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소싯적 어머니를 잃고 홀아버지 슬하에서 갖은 고생 다 하시며 배우지 못했던 탓에 어린 나이에 먼 친척이 경영하던 철공소에서 용접을 비롯한 쇠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다 배워 그 당시에 남성들이라면 첫손가락으로 치던 철도원이 되어
평생 박봉의 철도원 인생을 원하시며 오직 그 길만이 당신께서 가셔야 할 길이라 여기며 사셨던 아버님의
인생 탓에 죄라고는 아버님께 시집오신 죄밖에 없는데 현재 이 시대 여성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갖은 고생을 다 하시며 자식 3남매 남들과 같이 호강은 시켜주지 못하여도 고생은 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야무진 결심 끝에 억척같이 사셨던 어머님께서 다른 돈벌이를 겸하며 장날마다 열차를 타고 시골 장을 찾아 그 고장의 특산물을 도맷값으로 때다가 직접 이웃에 팔거나 가까운 시장 소매상에 넘기곤 하셨는데 그날도 경상북도 의성 5일장을 맞이하여 새벽 일찍 열차편으로 의성으로 올라가 거의 하루를 장에 가져나온 장사꾼들의 물건을 사서 화물열차편으로 부쳐놓으시고 마지막 열차편으로 내려오신 것까지는 좋았으나, 부산역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을 세 아이를 떠올리니 성급해진 마음이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열차 난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열차가 역내에 정차한 듯 느껴져 한 발아래로 내려 딛는 순간 어머니의 피로에 지친 육신은 거북이걸음처럼 느리게 굴러가고 있던 열차 바퀴 속으로 빨려들게 되었고 옛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던 말처럼 순간적으로 집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가더라는 것 "아차! 하는 생각에 잽싸게 옆으로 돌아누우니 등 뒤로 열차 바퀴들이 철커덕거리며 스쳐가더라는 말씀, 아주 예전에 흘러가 버린 세월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유증으로 어머님께선 며칠을 앓아누우신 바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진 형님과 누이동생의 결혼과 우리 일가의 일원을 새로이 태어난 조카들의 재롱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본디 자손이 귀했던 우리 집안이고 남달리 아이들을 좋아했던
우리 가족들은 형님네 큰 조카가 태어난 이후 밤잠을 설쳐가며 아기에게 매달렸고 혼기를 앞둔 누이동생은 마치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처럼 온갖 사랑을 다 쏟았다. 30대 후반부터는 내 인생에서 전환기라 말할 수 있으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던 일들이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상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심 때문에 모든 종교를 부정 시 해오던 터라 신앙을 가져보라는 권유조차 미친 짓 한다며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참 신앙을 만나 그 후 수 없이 많이 지었던 죄를 속죄라도 하듯이 장시간 뜨거운 눈물을 흘린 바 있고 그 신앙 덕에 2년이란 세월을 난생처음 경상북도 문경에서 혼자 생활해본 일도 있다. 2년이란 그리 길지도 않지만 그리 짧지도 않았던 세월이라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 속에 유난히 생각나는 이가 있는데 그는 누구보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니었고 누구보다 빼어나게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 누구보다 순한 성품을 지녔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올해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나이 20대 후반 그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잘 생기고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이라 일등 신랑감으로 마을 어른들의 시선 집중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 집중도 잠시, 군대에 입대하여 소속부대에 배속을 받은 며칠 후 상관으로부터 건방지다는 이유로 심한 기압을 받아 그 정신적 후유증으로 정신이 흐려지게 되었고 매사에 의욕과 자신감을 잃어 늘 몽롱한 모습으로 생활하면서도 남달리 나를 따랐으며 나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믿어주었다.

그의 순박했던 모습을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다. 40대 중반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좋은 일도 많았고 나쁜 일도 많았으며 기억 속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표현할 만한 일들도 많았던 반면에 내 생에 있어
영원히 잊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개중에 슬펐던 일로는 1년 간격으로 영원히 함께 하실 거로 생각했던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던 일이다. 그땐 세상 모두를 잃은듯싶어 울음조차 속시원히 나오질 않았었는데 비정한 것이 인생사라 뼈주시고 살 주셨던 부모님 한 평 땅조차 없어 한 줌 재로 가슴에 묻었건만 뭐이 그리 좋아 먹고 싶을 때 다 먹고 웃고 싶을 때 다 웃고 떠드니 모를 건 정녕 인생이더라. 따라 죽을 수 없었어가 아니라 생명이 붙어 있어 살았더니 남은 인생 여정에 동고동락 살 비비며 살아갈 내자도 얻었고 부모님 살아생전 평생소원으로 기원해 오시던 글쟁이도 되었으니, 이승에 허락된 생 동안 글쟁이 본분을 다하여 남은 인생 더 아름다운 추억을 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