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서간' 해설] 14.종말은 예고없이 오니 늘 깨어 있어라
우리는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문자 하나하나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바오로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여 종말 시나리오를 언급하면서 의도했던 올바른 교훈과 의미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위아래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이들과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이들 모두가 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4, 17).
“주님과 늘 함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누리게 될 은총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서로 이러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이다(4, 18 ; 5, 11).
바오로는 마지막으로 종말은 예고없이 도둑처럼 닥쳐올 것이므로 늘 맑은 정신으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1테살 5, 2~6)
바오로는 1테살 4, 16~17에서 종말 시나리오를 밝히려 했던 것도 아니고, 교의신학적인 측면에서 종말론을 서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신자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살아있는 신자들과 이미 죽은 신자들이 동시에 똑같은 모습으로 종말 구원에 참여하여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재림 임박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앙생활과 교회와 신자들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위대한 사목자상을 엿볼 수 있다.
코린토
고대 코린토시는 그리스가 마지막까지 로마에 대항했던 요충지였으나 기원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에게 완전히 초토화된 후 약 100년간 거의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체사르가 코린토를 로마인들이 사는 식민읍으로 재건하고 도시 이름을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아 코린투스(Colonia Laus Julius Corinthus)라 하였다.
코린토는 기원전 27년부터 아키이아(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원로원의 속주로 선포된 기원후 44년부터는 총독이 거주하는 총독부가 되었다. 코린토 자체는 항구도시가 아니지만 북쪽과 동쪽에 레카이온 항구와 켕크레애 항구를 끼고 있어 상업이 번창했다.
유리한 입지조건 때문에 코린토는 은행, 상점, 공장 등을 갖춘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로 급속히 팽창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천박하고 윤리적으로는 퇴폐했다. 빈부의 차가 심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빈민층에 속했다.
당시 코린토는 그리스인, 로마인, 유다인, 동방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는데, 바오로 시대의 코린토 시민은 약 10만 명 정도 되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코린토는 종교혼합주의의 양상을 띠었다.
그리스인들은 미남신 아폴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예술의 여신 아테나, 운명의 여신 튀케, 치유의 신 아스클레페오스, 지하의 남신에게 강간당한 코레, 이스무스에 신전을 지닌 해신 포세이돈을 섬겼다.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체사르,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여 섬겼다. 코린토인들은 이집트 치유의 신 사라피스와 바다의 여신 이시스를 섬겼다.
코린토의 이러한 다종교, 다문화, 다민족 사회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용이하게 전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제 막 태어난 코린토 교회 공동체가 신앙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보존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코린토 교회
코린토는 에페소 다음으로 중요한 바오로의 선교지였다. 바오로는 2차 선교여행(50-52년) 때 오늘날의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 지방에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교회를 세웠다.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에서 선교할 때 유다인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티모테오와 실라스를 베로이아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 아테네에 내려와 선교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때 티모테오와 실라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파견하고 자신은 실라스와 함께 그리스 남부지역인 아카이아 속주의 코린토로 내려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에 힘썼다(사도 18,1-17)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사도 바오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위아래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이들과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이들 모두가 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4, 17).
“주님과 늘 함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누리게 될 은총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서로 이러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이다(4, 18 ; 5, 11).
바오로는 마지막으로 종말은 예고없이 도둑처럼 닥쳐올 것이므로 늘 맑은 정신으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1테살 5, 2~6)
바오로는 1테살 4, 16~17에서 종말 시나리오를 밝히려 했던 것도 아니고, 교의신학적인 측면에서 종말론을 서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신자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는 신자들에게 살아있는 신자들과 이미 죽은 신자들이 동시에 똑같은 모습으로 종말 구원에 참여하여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재림 임박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앙생활과 교회와 신자들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위대한 사목자상을 엿볼 수 있다.
코린토
고대 코린토시는 그리스가 마지막까지 로마에 대항했던 요충지였으나 기원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에게 완전히 초토화된 후 약 100년간 거의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체사르가 코린토를 로마인들이 사는 식민읍으로 재건하고 도시 이름을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아 코린투스(Colonia Laus Julius Corinthus)라 하였다.
코린토는 기원전 27년부터 아키이아(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원로원의 속주로 선포된 기원후 44년부터는 총독이 거주하는 총독부가 되었다. 코린토 자체는 항구도시가 아니지만 북쪽과 동쪽에 레카이온 항구와 켕크레애 항구를 끼고 있어 상업이 번창했다.
유리한 입지조건 때문에 코린토는 은행, 상점, 공장 등을 갖춘 상업과 경제의 중심지로 급속히 팽창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천박하고 윤리적으로는 퇴폐했다. 빈부의 차가 심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빈민층에 속했다.
당시 코린토는 그리스인, 로마인, 유다인, 동방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는데, 바오로 시대의 코린토 시민은 약 10만 명 정도 되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코린토는 종교혼합주의의 양상을 띠었다.
그리스인들은 미남신 아폴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예술의 여신 아테나, 운명의 여신 튀케, 치유의 신 아스클레페오스, 지하의 남신에게 강간당한 코레, 이스무스에 신전을 지닌 해신 포세이돈을 섬겼다.
로마인들은 율리우스 체사르,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여 섬겼다. 코린토인들은 이집트 치유의 신 사라피스와 바다의 여신 이시스를 섬겼다.
코린토의 이러한 다종교, 다문화, 다민족 사회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용이하게 전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제 막 태어난 코린토 교회 공동체가 신앙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보존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코린토 교회
코린토는 에페소 다음으로 중요한 바오로의 선교지였다. 바오로는 2차 선교여행(50-52년) 때 오늘날의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 지방에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교회를 세웠다.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에서 선교할 때 유다인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티모테오와 실라스를 베로이아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 아테네에 내려와 선교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때 티모테오와 실라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파견하고 자신은 실라스와 함께 그리스 남부지역인 아카이아 속주의 코린토로 내려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에 힘썼다(사도 18,1-17)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출처 :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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