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보따리

신앙 이야기 | 매일 한 걸음씩

松竹/김철이 2026. 3. 5. 17:30

매일 한 걸음씩

 

 

주보에 성가지(聖枝) 회수 공지가 나오면 ‘이제 곧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구나’하고 마음이 바빠집니다. 사순시기 동안 속죄와 회개의 실천으로 나만의 작은 약속 한 성가지를 정해 지키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의 부 활을 기다리는 일이 저의 봄맞이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각 방 십자고상에 걸린 가지들을 봉투에 담으며 이번 사순시기의 다짐은 ‘미루지 않기’로 정해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의 저는 사자(獅子)처럼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밀리고, 성 경 읽기도 밀리고, 답장도 밀리고... 일찌감치 현관 선반에 챙겨 둔 성가 지조차 미루고 미루다 마감일에 낸 ‘밀림’의 왕 사자!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뒤로 미루고, 마음속 결심을 다음 날로 넘기고, 변화가 필요한 때에도 좀 더 이따가로 덮어두는 습관까지. 사소해 보이 지만 그 미루기 속에는 두려움과 게으름, 그리고 스스로 온전히 내맡 기지 못하는 마음이 숨어 있음을 느낍니다. 어쩌면 미뤄 둔 것은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뱡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첫걸음을 늦추고 있는 상태 말입니다. 빛이 어디 있는지 알지만, 그 빛을 향해 몸을 돌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이 눈부신 빛을 보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엉 뚱한 말을 꺼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두려워하는 모습이 왠 지 낯설지 않고, 이상하게 위로가 됩니다. 빛을 보았지만 아직 그 빛대 로 살아갈 용기가 없어, 저 역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순간보다 익숙한 미루기 속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조 차 머뭇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저의 더딤을 조용히 감싸 주는 듯 합니 다. 그래서 부르심이 책망이라기보다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낮은 목소리처럼 느껴집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미루지 않으려 애써 봅니다. 짧은 기도를 오늘 드리기, 미뤄 둔 안부를 지금 전하기, 완벽히 끝내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작하기. 눈에 띄지 않을 작은 변화들이지만 이런 날들이 쌓이면 마 음의 방향도 서서히 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빛은 산 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람들 사이 로 내려와 가장 어두운 자리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가셨습니다. 나지막 이 저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따라 완벽하지 않아도, 여전히 망설여도, 오늘의 한 걸음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매일 한 걸음씩 빛을 향해 걸어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