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발표작

손 | (수필)한비문학

松竹/김철이 2026. 1. 13. 08:00

 

                                    김철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땐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나지만, 생을 다하고 되돌아갈 땐 반대로 두 손을 펴고 죽는다. 왜 그럴까? 이 섭리는 세상에 올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움켜잡아 가지고 싶어서이고, 돌아갈 때는 남을 이들에게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내주어 빈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홀아버지 슬하에 남겨진 남매가 있었다. 남동생과 나이 차가 났던 누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공사판을 떠돌며 생활비를 버느라 허덕이는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학업을 중단하고 재래시장 한 귀퉁이에서 산나물 장사를 시작했다. 아직은 부모님 슬하에서 응석받이로 지낼 나이에 온종일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물을 캔 뒤 까만 밤이 하얗게 밝도록 캔 나물을 다듬었다. 동생은 누나 없는 빈집이 싫었고, 누나가 캐오는 산나물이 너무 싫었다. 숙제를 마치고 나면 으레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도록 누나를 도와 나물을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의 눈앞이 깜깜해지는 일이 생겼다. 선생님께서 이번 주 토요일까지 부모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공사장 일을 따라 다른 지방에 가 계셨기에 모셔 갈 사람은 누나뿐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름한 옷, 나이에 걸맞지 않게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 온통 손톱 밑을 자리 잡은 새까만 땟국,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보실 누나 손톱 밑의 까만 때가 싫었다. "저, 누나! 선생님이 내일 학교에 오래" 동생은 너무 속이 상해 핑계를 대고 저녁밥도 굶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교무실로 간 동생은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누, 누나!" 선생님은 누나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현수야! 누나의 공을 갚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현수는 선생님의 그 말씀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이 눈시울을 붉히며 잡아준 누나의 손은 퉁퉁 불어 있었고 온통 새빨간 상처로 충혈돼 있었다. 누나는 동생이 나물 물이 든 자기 손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미리 알아차렸던 거였다. 해서 아침나절 내내 표백제에 손을 담그고 철 수세미로 문질러 닦았던 거였다. 현수는 새까맣게 탄 누나의 얼굴을 쓸어안고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한 아름다운 소녀가 길을 가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도 모르게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혼자 애쓰는 가엾은 말을 보았다. 말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듯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보드랍고 흠 없는 자신의 고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고운 마음씨는 고운 손은 아끼지 않고 아파 발버둥 치는 말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말의 발굽 밑에 박혀있던 큰 가시를 빼주었다. 가녀린 소녀의 손으로 거칠고 험한 일을 하느라 손은 온통 피로 물들였다. ​

 

서민층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로 전근을 온 여교사가 담임을 맡은 1학년 반 아이들에게 각자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대상을 도화지에 그려 내일까지 가져오라고 했다. 아울러 마음 한편으로 서울에서도 가장 가난한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과연 감사하게 여길 대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식탁에 차려진 갈비찜이나 갖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그려오지 않을까, 그런데 반장인 영수가 내미는 그림을 보고 여교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수의 그림 속엔 설명도 없이 단순하게 손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과연 누구의 손일까? 영수의 그림을 보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저건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손이 틀림없어요."

 

연이어 다른 아이가 말했다. "저건 분명히 농부의 손이에요. 쌀을 농사지으니까요." 마침내 여교사는 영수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것이 누구의 손을 그린 것인가를 물었다. 영수는 몇 차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건 선생님의 손이에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여교사는 쉬는 시간마다 유독 가난하여 따돌림받던 영수를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곤 했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종종 그렇게 했었다. 하지만 영수의 마음속엔 무심코 행했던 담임의 행동에 큰 의미로 남았던 거였다.

 

사람은 한평생 세 가지 형태의 손을 지니고 산다. 세 가지 손의 모습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바위 손을 가지고 온다. 무엇인가를 손안에 꼭 쥐려고 하는 모습이다. 세상 것을 죄다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자기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어린아이들은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강하다. 조금 자라게 되면 두 손가락을 펴는 가위 손을 한다. 조금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며 내 것을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태도의 표시인 거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사람은 손을 활짝 펴는 보의 손을 지니는데 이는 내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놓겠다는 표현이다.

 

한 해의 가을걷이를 앞둔 이즈음 세상 숱한 손들의 수고가 쟁여 들어 한 해 농사의 수확을 하는 법인데 이때 바위 손, 가위 손, 보의 손 중에 어떤 손으로 가을걷이해야 대자연의 섭리를 거슬리지 않고 수확할 수 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