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 01 10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Jzoe-_0pOSg
2024년 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 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치유는 회복입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원숭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든 인간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는 인간은 앞으로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어진 법칙대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피부병약을 짓고 의사가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마시겠다고 하면 약을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해로워질 수 있습니다. 치유와 순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치유와 같은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뜻에 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치유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을 다는 게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를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심으로 순종을 배울 자세가 되었다면 더 빠른 치유를 주실 것은 같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 중 대포알에 의해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으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붙자, 이냐시오는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의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긴 회복 기간에, 이냐시오는 오락거리를 찾았으나 집안에는 종교 서적만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성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깊은 영적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제된 고요함과 신체적 회복의 시간은 그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가 의료 권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듯이, 그의 영혼도 신적인 영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필요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영적 치유의 이중 과정은 이냐시오에게 겸손과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혁은 그를 예수회 창설과 영신 수련 집필로 이끄는 깊은 영적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의 경험은 고통 속에서도 순종이 어떻게 깊은 치유와 새로워진 삶의 목적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는 1202년,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쇠약과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도 겪었고, 자신의 과거 세속적 삶의 공허함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해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의 자유, 야망,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조롱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치유와 율법의 준수는 하나입니다. 요한 9,1-7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치유해주시는데, 그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만 치유가 완성되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보다 더 큰 목적은 순종을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2열왕 5,1-14에서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는 순종을 강요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게 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히즈키야의 치유(2열왕기 20:1-11)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어야 할 운명인 히즈키야가 눈물로 청원하자 그의 생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곧 순종의 과정입니다. 만약 치유의 은총이 있고 난 뒤에도 순종보다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면 치유가 은총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를 원하기 전에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먼저 드립시다. 그러면 분명 더 빠르게 치유해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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