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김철이
세상을 두 번 사는 사람 하나 없듯 부자건 가난하건 잘 났건 못났건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벌거벗고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착각 속에 사는 것 같다. 마냥 쟁이고 쌓는 걸 보면...
오십여 년 전 부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 삼십 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4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키우며 갖은 고생 다 하며 사시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워지자 떨어져 생활하던 4남매가 본가에 다 모였다. 그때 어머니가 둘러앉은 자녀들을 올려다보며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평생 다이아몬드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구나”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유언이자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 들어 드리지 않을 수 없지 않냐?”
4남매는 의논 끝에 조금씩 돈을 모아서 어머니께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다.
이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교묘한 제안을 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최근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빼서 되돌려주면 어떻겠는지요?”
형제자매들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려다가 고급 상자에 넣은 다음 누워계신 어머니께 가지고 갔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불빛에 비쳐 보고 얼굴에 비비시며 한참이나 좋아하시더니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자녀들이 물을 떠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반지를 빼내 입에 털어 넣고는 물과 함께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며 자리에 누우시면서,
“너희가 선물한 반지 어미가 극락까지 고이 가지고 갈란다”
하시더니 숨을 거두셨다. 자녀들 사이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어떻게 찾아 돌려주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반지를 찾아야 한다고 우기자, 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결사, 반대했다. 결국 화장을 시켜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았는데 손상이 너무 커서 도저히 반지 주인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 새 반지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우매한 이 어머니는 반지를 삼켜 배 속에 넣은 채 저세상 노자로 가지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몇 년 전 시간당 110㎜ 이상의 폭우가 쏟아져 서울 강남이 물난리를 겪었을 때의 일이다. 어떤 가톨릭계 교수가 잠을 자다가 빗물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가족들과 밖으로 피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단이라 미처 집안의 귀중품을 지니고 나올 여유가 전혀 없었다. 쫓기듯 밖으로 뛰쳐나온 교수는 허탈한 마음으로 집을 바라보다가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우리의 죽음도 이토록 졸지에 맞겠구나. 내가 지녔다 하여 정녕 내 것이 내 것이 될 수도, 세상에서 소유했던 물질 단 한 가지도 챙겨 갈 수 없으니 결국 빈손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불행한 날을 맞겠구나"
이후 교수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수직과 흔히 말하는 금수저 신분을 내려놓고 남은 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가족을 두고 홀몸으로 전국을 여행 중이다.
서울에 위치한 어느 병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새벽에 건장한 신사 한 사람이 심장마비로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 문을 들어섰다. 이 신사를 급히 응급실로 옮겼지만,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확인했다.
그런데 의사는 죽어있는 신사를 내려다보며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일반적으로 두 손을 펴고 죽는데 신사의 시신은 오른손을 펴고 왼손은 꼭 쥔 상태였다. 죽은 신사와 더불어 119구급차로 이동했던 친구들이 신사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등 부산을 떠는 사이 담당 의사는 조용히 시신에 다가가 움켜쥔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했다. 시신의 손안에선 붉은색의 마분지 같은 형체가 비치더니 남은 엄지와 검지를 펼쳤을 때 그의 손안에서 화투 두 장이 떨어졌다. 화투 두 장을 보는 순간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어허! 삼팔광땡이네!"
신사가 죽게 된 사연은 이랬다. 고인이 된 신사는 상갓집으로 조문을 갔다,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화투를 쳤다. 새벽녘 지니고 있던 돈을 거의 잃어갈 즈음 판돈이 잔뜩 쌓였는데 화투 두 장을 받아 들고 살며시 펼쳐보니 삼팔광땡이었다. 화투판 규칙에 따르면 이런 판에 최고의 패를 잡으면 이미 건 판돈의 세 배 이상을 거둬들이게 된다고 하니 그는 너무나 감격스러웠던 나머지 화투장을 미처 펼치지도 못한 채 "삼, 삼. 하더니 쇼크로 심장마비가 찾아온 것이다. 이 사연을 전해 들은 이들은 열이면 열 조롱을 하거나 헛웃음을 웃고 말겠지만, 누구나 이런 삶을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화투 두 장을 들고 펼치지도 못한 채 말을 더듬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것이나, 큰 규모의 땅문서 몇 장 들고 전전긍긍하다 저승 갈 노잣돈도 준비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먼 옛날 어느 갑부의 자녀들이 부친이 평생 갖은 고생 다 하며 모은 재산을 놓고 형제간에 쌍코피가 터지고 마빡이 깨지도록 다투니 부친이 보다못해 유언을 남기길 만인은 죽을 시 공통 적으로, 빈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깨우침을 남기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시신이 들어갈 관의 양쪽 옆에다 손 하나가 나올 만한 구멍을 뚫으라고 했듯 2024년 갑진년 한 해도 저물어가는 시점에 행여 우리 주변에 도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없는지 마음의 눈을 부릅뜨고 두루 살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