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꿀샘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 2024 09 27

松竹/김철이 2024. 9. 27. 07:11

[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09, 27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r_7T_ZyuGWA

 

 

 

2024년 나해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