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서 가만히 머무름
이한석 사도요한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잘 쉬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이 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도 의미 있지만 내면의 소 리에 귀 기울여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 야기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만이 중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잘 쉴 수 있는지 우리 사회는 이제야 제대로 된 고민을 시작한 듯합니다. 그러나 잘 쉬는 것에 대한 관심과 이를 위한 선택이 새로운 장소, 낯선 문화, 새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좁혀지는 것 같습니다. 자칫 ‘잘 쉬는 것’이 ‘다르고 좋은 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대체될 까 걱정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견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외 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고 하십니다. 예수님 과 제자들은 군중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할 만큼 일 로 소진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결국 예 수님과 제자들은 조금도 쉬지 못하는 듯합니다. 자리를 옮겨간 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 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께서는 쉬지 못하시고 다시 일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에서 사용된 ‘휴식’이라는 성서 단어는 우리말의 ‘쉬고 숨 쉬는 것’(休息)과 의미가 다릅니다. 원어의 의미를 풀자면, ‘거기에(ανα) 멈춰서 머무르는 것(παυω)’입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사실 예수님은 못 쉬신 것이 아닙니다. 부 모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가엾게 보시며 ‘그 들의 삶에 멈추어 서시어 머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사람들의 고통과 갈망 앞에 멈추시어, 그들과 함 께 머무르시며 진정한 휴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쉬려고 하시다가 못 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 고 그 아픔을 채워주며 삶을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 (ἀναπαύω)을 하십니다.
우리가 찾는, 잘 쉬는 방법에 대한 생각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삶 속에서 ‘나’의 목소리에 귀 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가 있어 야 그 원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나’만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휴 식은 늘 목마르며, 공동체의 현실과 관련 없는 쉼은 공허 한 자기만족에 그쳐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 듯이, 내가 멈춰서 머물며 진정으로 쉴 수 있는 곳은 나의 사랑을 원하는 ‘가엾은 너’와 이룰 공동체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당신의 쉼으로, 너와 내가 주고받을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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