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파이팅 필리피노(Fighting Filipinos)

松竹/김철이 2024. 5. 29. 09:01

파이팅 필리피노(Fighting Filipinos)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끝난 현장에서
한 미군 장교가 수많은 사상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러자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필리핀의 기관총 사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Those are dead reds, sir.
(전부 중공군의 잔해입니다)”

이 전투는 바로 1951년 4월 22일,
필리핀 참전군과 중공군이 경기도 연천군 율동에서
격전을 벌였던 ‘율동 전투’였습니다.

필리핀은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반도에 전쟁의 그늘이 드리웠던 6.25 전쟁 당시
필리핀은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
우리나라를 도왔습니다.

필리핀은 6.25 전쟁 발발 이전,
과거 여러 강국들에게 식민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6년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필리핀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은 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지만,
민주주의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일념으로
약 7,500명이 6.25 전쟁 참전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큰 전투인 율동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율동은 철원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 3번 국도 인근으로
당시 재탈환한 서울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중공 34단 전 병력을 동원해 핵심 지역인 율동을 향하여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율동을 사수하고 있었던 것은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이었는데
벌 떼처럼 밀고 들어오는 4만 명의 중공군에게 맞서야 할
필리핀 군은 1,400여 명이 전부였습니다.

필리핀 군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행정병, 운전병, 취사병들도 전투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필리핀 대대는 중공군의 포격으로
상위 지휘 본부와 통신까지도 두절되는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퇴로 차단의 위기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중대장 ‘콘라도 디 얍’ 대위는
대대장으로부터 즉각 철수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한 후
철수하겠다고 보고한 뒤 역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적진을 돌파하며 고지 탈환에 성공했지만,
얍 대위는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율동 전투에서 죽기 살기로 싸운 필리핀 군은
12명 전사, 38명 부상, 6명 실종인 반면에
중공군은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대승을 거뒀습니다.

 

 

자신의 청춘을 바쳐 이 땅의 자유를 지켜주신
6.25 전쟁 참전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그 희생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 프랭클린 루스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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