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소통

말씀의 이삭 | 두부 한 모, 웃음 한 입

松竹/김철이 2024. 5. 21. 11:30

두부 한 모, 웃음 한 입

 

 

 

아빠를 기다렸습니다.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 러 갈 거거든요. 그런데 침을 맞고 오시겠다며 휴대폰을 두고 나가신 겁니다. 아빠를 찾아서 동네 골목을 돌았습니 다. 저만치에서 자전거 한 대가 다가옵니다. 아빠였습니 다. 입가에 뭉실한 미소 한 자락 얹으시고 기분 좋은 표정 이십니다. 큰딸이 온 게 반갑고 기쁘신 거지요. 자전거 바 구니엔 까만 비닐봉지가 있었고, 아빠는 자랑하듯이 뭔가 를 꺼내 보이십니다. 커다란 두부 한 모와 흙 묻은 당근입 니다. 따끈한 두부에 김장 김치를 싸서 당근 주스랑 먹이 고 싶었던 겁니다. 불과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찰나지만, 영 화 어디에선가 봤음직한 장면 같습니다. 콧등이 시큰해지 며 눈물이 나려는 걸 참고 영화를 봤습니다.

 

아빠와 이렇게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아빠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빠는 세 살 때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술만 드시면 우셨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불쌍해 보일 정 도였지요. 저는 태어나서 술을 드시지 않는 아빠의 모습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집안의 왕처럼 군림하시며 권 위적이고 무서웠던 아빠는 엄마를 힘들게 하셨습니다. 자 식들은 술 드시는 아빠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맏딸인 저와 엄마는 아빠의 인생이 하느님의 영 안에서 다시금 일어서 고 변화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변하지 않았 고, 저희는 좌절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내 뜻에 맞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요. 아빠의 모습 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십자가를 껴안 아 보기로 한 겁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빠가 빨리 변하기 를 바랐던 기도를 멈추었습니다. 아빠의 인생이 다 잘못된 것처럼 여기며 그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제가 구원되고 변했기 때문입니다. 알코홀릭 아빠가 없었더라 면, 저는 죽도록 기도하지 않았을 거고, 하느님을 만나지 도 못했을 거며,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지도 못했 을 겁니다. 아빠는 제게 구원의 도구인 동시에, 제 자신과 화해하게 해주신 정화(淨化)의 선물입니다.

 

아빠는 4년 전 폐암 초기로 수술을 받으신 데다, 작년엔 췌장암 2기로 생사를 넘나드는 개복수술을 받으셨습니다. 항암 치료까지 잘 마치셨지만 이제 더 이상 술을 드실 수 가 없습니다. 엄마와 함께 바친 저의 기도가 응답받은 것 일까요? 제 평생 술을 드시지 않는 아빠와 살아본 적이 없 어서, 지금의 행복이 낯설기만 합니다. 큰딸이 온다고 갓 만든 두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오시며 배시시 웃던 모 습, 그 따뜻한 사랑이 제겐 응답입니다. 그 장면이 너무 아 름다워 한 컷의 스틸 사진처럼 마음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술 안 드시는 아빠와 살아볼 기회를 주 시고, 부녀간에 추억을 만드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 께 감사드립니다. 아빠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빠, 살 아계셔 주셔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대단하신 우리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