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빈첸시오 신부님|20221218 오늘의 말씀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hA9LnRlvLIY
천주교 부산교구 장산성당 대림 제4주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림의 두 번째 시기에 들어와 우리는 마지막 남은 초 하나에 불을 켰습니다. 이제 4천년의 기다림이 무르익어 주님의 성탄을 나타내는 우리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4천년이 완전한 기다림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주님의 말씀을 되짚어 살펴보듯 우리에게 처음오신 주님의 탄생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짐작해봅시다.
주님 성탄의 날을 몰라 우리는 이 겨울 흰눈을 상상하는 어느 한 날을 주님의 오신 날로 기억하지만, 우리의 이 초라한 현실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어느 날, 어느 밤인지도 모를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처음부터 알려질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탄생의 그 순간까지 말입니다. 바로 ‘동정녀의 잉태’가 지닌 진실입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성모님은 자신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함께 살기 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은 해야 하지만 그 날이 되지 않았기에 그 날은 무르익지 않았고, 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근거도 희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한 꿈인 듯 싶을 때 성령의 잉태는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남편인 요셉조차도 모르는 순간에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동정녀는 깨끗하고 순수한 단어로 우리 머릿속을 차지하지만 실제 그 말은 ‘부족함’을 뜻합니다.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거들짝이 없는 못갖춘 마디의 상태에 하느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
남편이지만 그 조차 완벽하지 못했던 것은 요셉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꿈도 천사도 아무것도 없었던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소문으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갈래의 길에서 당황합니다. ‘의로운 요셉’이 불의한 듯 보이는 소문 앞에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말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결국 요셉의 선택은 의로움을 벗어납니다.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그는 그 이유 모를 불행한 일에 한 부분이 되기로 합니다. 이미 정혼을 했음에도 남모르게라는 단어는 이 파혼을 정당한 것으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정녀의 잉태만큼 이 모자란 남편의 처지도 안타깝기 그지 없을 때 이미 하느님은 우리 안에 와 계셨습니다. 평생을 법대로 살던 이가 법을 어기고 비켜가게 된 셈입니다. 어이없게도 그 이유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동정녀 어머니와 의인을 내려놓은 아버지 요셉 사이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첫 번째 오심은 그렇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모를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드러납니다. 단지 그 날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듯 정말 우리는 모를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분명 이루어졌지만, 구약의 예언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은 많이 틀렸고, 잘못이었음을 우리는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 덕분에 들키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중에 오신 주님은 완벽히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4천년을 기다렸다는 인류는 우리를 그냥 말로만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지었을 뿐, 하느님의 뜻도 깨닫지 못했고, 눈에 보이는대로 느끼는 대로 우리를 먼저 판단하고 나누어가며 하느님을 말하고 눈물짓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생애도 뭐하나 이루지 못한 듯 보이는 채로 십자가에서 끝이나버립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며 주님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비석하나 꽃 한송이로 입에 따르지 못하는 위대한 성인을 말하듯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못갖춘 마디이나 하느님의 뜻을 믿었던 어머니와 영문을 몰라도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하게 여긴 아버지 사이에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단어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그 하느님이 계셨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살펴야 합니다.
2천년 전의 사람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곧 우리는 부족함을 놓고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그럴 때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완전히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았고, 들었으며 경험한 우리는 지금도 온전히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 속의 주님을 알기에 임마누엘이 단어가 아니라 현실임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그 말은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아니라 현실이며 언제나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잊지 말고 기쁘게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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