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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대림 제3주간 목요일/ 2022 12 15

松竹/김철이 2022. 12. 15. 00:00

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대림 제3주간 목요일/ 2022 12 15/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isdTNZ8L1_k

 

 

 

2022년 대림 제3주간 목요일 – 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 이전에 이미 요한의 세례에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요한 7,29-30)
이 말씀에 따르면 요한의 세례는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고 번역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스어로 ‘불레’라는 이 단어는 “계획, 의도, 목적”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닌 ‘이전에’ 세상을 향한, 혹은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면 첫 피정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생각나는 것부터 쭉 써보라고 합니다. 저는 왜 그런 것을 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기억부터 쭉 쓰면서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부터 부르고 계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가장 중요한 책이 하.사.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부러움에 사제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저의 모든 판단의 기준은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밖이 더 행복하게 보이면 바로 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하면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선택의 기준은 바로 저의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부터 행복을 찾게 하시고 그 행복을 통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예정설’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물리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 행복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 곧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항상 옳은 분이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이승복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체조선수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척추 손상으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물론 손가락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을 좋은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는 그 말을 믿었고 최고의 재활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체조선수의 꿈은 딸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는 항상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듭니다. 이 의도가 ‘불레’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도 하느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하늘과 땅은 두 상반되는 극과 극을 상징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이시라면 인간은 땅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벌입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먼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이 어떻게 하늘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순종하면 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산소가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 산소는 하늘의 것입니다. 인간은 공기를 마시며 그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 안에 머물면 땅도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여자의 몸에서는 난자가 만들어집니다. 그 난자는 여자의 몸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짧은 한 달의 주기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난자가 더 오래 사는 법은 밖에서 자신을 초대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자입니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여자의 몸 밖에서 살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살게 됩니다.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은 다 이렇습니다.
성자께서는 하늘에 속한 분이시지만 직접 땅의 인간이 되셔서 어떻게 하늘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보여 주어야 인간이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도 하늘에 아드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써 땅의 육체를 지닌 인간도 하늘에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원리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고 인간은 땅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남자로 땅은 여자로 봅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는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교회가 신부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어린양과 혼인하게 됩니다(묵시 21,1: 9-10 참조). 교회는 진정 “흠 없는 어린양의 흠 없는 신부”(796항)입니다.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이라 부르고 몸으로서 자신을 신부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796항 참조).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이 완성되고 그때가 창조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묵시 21장 참조).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결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주님 창조의 계획입니다. 다만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 속한 땅’이 됩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부터 흙으로 된 모든 인간을 하늘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분명 하늘의 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순종하는 일로 성취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일이 하느님을 의롭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은 만든 것에 책임을 지십니다. 자녀가 자녀가 되는 것이 자녀의 행위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의 계획에 따름이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고 생명을 지속하는 길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음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창조자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으며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