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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2022 11 04/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松竹/김철이 2022. 11. 4. 08:03

2022 11 04/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클릭):https://www.youtube.com/watch?v=VRculcZvjUg

 

 

 

 

2022년 다해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서 “아버지고 동생이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내용입니다. 조 변호사는 좀 특이한 소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건물에서 나가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동산 소유주는 누나이며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서울에 있는 자기 건물 2층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보증금이나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10년째 그 건물에서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합당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라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 체결을 요구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기존의 무상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나가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소장 내용만 보면 아버지와 남동생은 6개월 이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인데 누나가 이렇게 갑자기 매몰차게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대해 아버지와 남동생은 누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나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내몰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오갈 데도 없는 아버지를 추운 겨울에 내쫓는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법은 천륜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조 변호사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서는 누나가 아닌 천륜만 고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누나와 형욱 씨는 10살 터울입니다. 아버지는 외향선을 타는 뱃사람이라 집에서 자녀들과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더는 배를 타지 못하고 노름과 술에 빠져 어머니에게까지 심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한 어머니는 누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출했고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형욱 씨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형욱 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덕분에 형욱 씨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고 형편이 조금 안정이 되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의정부에 두 채의 건물 소유주가 됩니다. 누나는 사업을 해보겠다는 형욱 씨를 위해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형욱 씨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결혼을 아버지와 동생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자의 학력이 고졸이고 분명 누나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달라질 줄 알아서 남자 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면전에서 면박까지 해주었습니다. 가족 간에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조 변호사는 변호를 의뢰한 형욱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욱 씨,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제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욱 씨에게 이러한 글을 재판할 때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소송을 진행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에게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특히 매형 될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함을 그분에게서 느꼈을 텐데 이를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는 평생 누나에게 짐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상관없이 더 이상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초안을 읽어본 형욱 씨는 난처해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송은 지게 되어 있고 방법은 이것뿐이었습니다. 형욱 씨는 못내 불안해하면서도 이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3주 뒤 재판 당일, 누나 측 변호사는 “재판장님,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구적인 무상사용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이 야속했던 것입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살고 있던 건물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가족 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 비유입니다.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입니다. 나를 맞아들일 친구를 불의한 재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물이란 나의 것이 아닌 재물을 의미합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여긴 데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누나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책과 같은 것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누나의 재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것입니다. 누가 나의 것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다고 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가족도 필요 없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아버지가 아이가 드라이버로 자기 스포츠카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쳤습니다. 아이의 손이 부러졌고 아버지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낙서를 했나 봤습니다.
“LOVE U DAD”(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나의 것’이란 표를 해 놓으면 나는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맞아들일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나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평생 거처를 다시 얻었습니다. 나의 것이란 생각만 없애도 그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스님은 자신이 아끼던 난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니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말하며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난을 선물하였다면 그 난에는 아직도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이 남거나 상대에게 보답을 기대합니다. 불교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안 계시지 가지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많이 갖건 적게 갖건 내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내가 가졌지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제가 함께 방을 쓰던 아프리카 친구가 저의 것을 자꾸 자기 것처럼 쓸 때 짜증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분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내 것이라는 말을 안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꾸 “내 것”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면서도 “어차피 내 거 아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롭지 못한 것”, 곧 주님의 것을 내가 유용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나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소유이지 나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다 주님 것을 맡겨 놓은 것으로 여기고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도 무소유입니다. 욥의 이 말을 새깁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