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1. 3. 1. 11:34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델이 되시는 분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느끼고 기도를 드리지만 그분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가져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자비하심과 넓은 사랑으로 은총을 받는 데 집중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삶의 길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고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우리를 놀라게도 부담스럽게도 하지만 우리가 손사래를 치고 안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희망을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주님을 늘 말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사람으로서의 자세와 삶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우리와 다른 주님이 아닌 우리와 같았던 주님을 기준으로 그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나마 우리가 동의하고 따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실천적인 가르침은 네가지 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이 네가지 가치들은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고, 매일과 매순간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로 설명할 이유도 없는 쉬운 내용이지만 우리의 삶으로 들어가면 그리 쉽지 않은 말씀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생각하여 우리가 심판 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는다면 좋겠지요. 그리고 용서 받고, 받는 생활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 삶을 뒤집어 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당황하게 하십니다. 심판이나 단죄하지 않고 사는 것과 용서하고 주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거의 손해를 보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단어도 좋고 행위도 나쁠 것이 없지만 우리에게 손해는 곧 악한 것처럼 느끼는 우리는 주님은 좋지만 말씀은 거절하려 합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더 큰 하나의 가치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하고 흠 많은 삶에도 심판과 단죄의 순간을 끊임 없이 미루시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대신 용서와 필요한 가치로 함께 하십니다. 그런 것은 단순히 마음이 좋다는 표현만으로 부족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의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우리의 삶의 판단과 기준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맞는 말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결정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우리가 충분히 세상에서 그렇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자비가 아니었으면 당신에게 십자가의 수난이 주어지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착한 사람들의 세상을 세상의 권력자들은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이들이 세상을 하느님의 세상으로 회복시킬 때 가능합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만 착하고 선한 자비의 하느님으로 만들지 말고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