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松竹/김철이 2020. 12. 30. 10:37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x7Ndo1UwVnQ

 

 

 

시메온에 이어 또 한명의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평생을 성전에 머무르며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 안에서 머문 사람입니다. 시메온과 마찬가지로 이 나이 많은 예언자 역시 이 아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속량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합니다. 

 

성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성인이 되신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가르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며 구원을 말한 시메온과 한나는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 전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말한 구원은 먼 미래에 대한 예고였을 뿐이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 가능성만 가득한 존재에 희망을 부여할 수 있고 기원이 담긴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아기는 그 자체로는 무지와 무능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정확히 반대의 처지에서 주님은 이 세상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이 알려주신 것을 알아들은 이들이기에 그들의 예언은 참되고 분명 이루어졌음을 알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기에 이미 충만하게 이루어진 하느님의 뜻을 믿고 위로를 받은 평생 의인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지금의 기준으로 예수님처럼 태어난 아이에게 훌륭한 인물이 될 확률을 따져본다면 결과는 어떨까요? 평생을 살면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모두 보아온 사람들입니다. 성전에 머물렀으므로 그들 중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과 같았을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인정한 이 아이는 그 어느 하나의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그 순간과 환경 만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연장시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생활로 이어보더라도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분이 되시지 않았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은 예수님께는 허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분은 죽을 때도 나자렛이라는 이름으로 조롱을 당하신 그리고 본보기로 죽었던 십자가의 죄인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음에 배신과 음모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권력자의 희생과는 전혀 다른 백성의 죽음이었습니다. 

 

 

무죄한 아이. 깨끗한 아이가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랄 것을 믿고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기쁨과 기대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미래가 아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평생을 모두 살아 그 끝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에 대해 신뢰와 기대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면 이들의 기쁨과 예언은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거시는 믿음과 희망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아직 품고 살아갑니다.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됩시다. 

 

해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 성탄은 그렇게 우리의 근본을 알려주시는 아기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