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松竹/김철이 2020. 12. 26. 10:56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성탄의 다음날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을 맞이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신앙은 '죽을 만큼인가?'의 공통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은 옳고 바른 것입니다.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비웃을지언정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목숨이 달렸다면 그것을 포기할 정도인가의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세상이라면 내가 있어야 다른 것도 있다는 논리 앞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그리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걱정하지만 우리는 그 젊은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 신앙이 자신들의 미래와 현실을 걸어도 좋을만한 가치라는 것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은 모두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에에 이런 답을 가지게 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스테파노는 초대 교회의 부제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었던 부제들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두터운 이들로 뽑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현실적인 부분에 가장 적합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분배하는 것은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공정하고 올바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고 고백했던 이 신앙은 죽음의 순간조차 그리스도를 닮아 살인자들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누군가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닌 신앙을 지킨 가치로 바꾸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신앙, 곧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닌 끝까지 지켜야 할 전부였다고 봐야 합니다. 신분의 질서가 무너져도 그것이 바른 것이니 그 가치를 떠날 수 없었던 우리 순교 선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듯 말입니다. 우리에겐 생명의 가치로 순교를 따지지만 그들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성탄의 주인공인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내용은 우리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러해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기에 우리는 순교가 아닌 삶으로 이를 따라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빼곤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인 이유는 우리가 누군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른 길을 걷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 뿐입니다. 

 

목숨으로 신앙을 저울질하는 이들에게 이 신앙은 어리석고 가냘픈 지푸라기로 보이겠지만 하느님은 또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