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부산교구 괴정성당 주임)
묵상 듣기 : youtu.be/bGEqJ0YTutE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 가깝고 우리가 풀지 못할만큼의 어려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곤란함이 될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오히려 신앙이라는 단어로 이것을 우리와 전혀 와닿지 않는 것으로 만들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더욱 많은 데도 우리는 '열심하지 않아서'라는 이상한 이유를 댈 때가 많습니다.
신앙은 열심히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실천하면 될 일인데 그와 다른 것으로 신앙을 이해할 경우나 아니면 이를 회피할 경우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얼마나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답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이야기이십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십니다. 임금에게 빚진 종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익숙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가르침 앞에서 "저는 주님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한 제자는 어떨까요? 그는 주님께 물었고 답을 얻었으니 그것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물은 것은 조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을 당하며 사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를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요? 이것이 어렵다면 그것은 내가 그러기 싫은 문제이지 풀기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신겁니다. 우리의 핑계를 미리 아시는듯 말입니다.
임금에게 빚진 종이 탕감을 받고 그의 가족들과 자신의 삶을 되찾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빚을 진 친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로 그가 다시 끌려 들어가 전에 빚을 다시 갚아야 할 때 임금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선명하고 단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고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양심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르침에 우리가 강제를 느끼는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곧 하느님을 닮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 필요하거나 공부와 연습보다 깨달음과 실천의 문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세상에 내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 마음으로 함께 부족함을 채우고 용서하며 완전하신 당신을 닮으라고 초대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분이시지만 분명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수준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말씀이 불만일 수는 있어도 어렵다는 말로 자신도 남들도 넘어지게 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모두가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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