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수필 3부작 고향의 그림자_제2부 거기 누구 없소?
김철이
세상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갖가지 추억을 체험한다. 누구는 어린 시절부터 윤택한 가정 형편 덕분에 마냥 유년 시절의 추억을 자랑거리로 삼지만, 누구는 어려웠던 가사 탓에 성장 후 유년 시절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고 어쩌다 간혹 되새김질하기조차 싫어서 옛 추억이란 단어조차 떠올리기를 몸서리를 치며 본인이 지닌 재력과 권력을 한배를 빌려 태어났던 형제들에게마저 공유하지 않고 외면하는 이도 주변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누구는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며 성장 과정에 갖은 고생을 다 하는 노력 끝에 고진감래라는 교훈을 뛰어넘을 정도의 권력과 재력을 누리게 된 성공사례자 중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성장 과정을 아픈 추억으로 되새김질하기 싫어서 피를 나눈 형제들마저도 외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유년 시절 뼈아프도록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동고동락하며 눈물 젖은 밥상을 받았던 기억이 애처로워 혈육들을 끔찍이 챙기고 품어 안는 이가 있어 성공사례자로 사회 지면을 훈훈하게 했던 미담도 있다.
이르듯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표정이 다르기에 가슴으로 느끼는 추억거리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고향을 향한 추억거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눈만 뜨면 시멘트 공간에서 별다른 감정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도 있고 산촌에서 태어나 갖가지 산새 들새 동무 삼아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았던 이들도 있으며 사시사철 갯비린내 물씬 풍기는 어촌에서 태어나 갯바람 지겹도록 맞으며 지평선 저 너머 너른 세상을 동경하던 이들도 있는데 내가 실질적인 영혼 속 고향으로 여겨온 내 어릴 적 연산2동 일대는 정취 깊은 산촌도 갯내음 솔솔 풍기던 어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전된 도심지 번화가도 아니었는데 언 육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는 어느 시골보다 시시때때로 각종 물새 떼 드나들고 삶의 의지가 생동하는 갯마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기쁘고 즐거운 추억도 남달리 많은 편이었지만, 당시 다들 풍족하게 생활했던 가정이 드물었던 탓에 마음 아픈 사연이 많았던 터라 내 가슴속에 움트는 아픈 기억들이 은연중에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내 영혼 속에서는 누군가 시시때때로 상념에 쌓일 때면 “거기 누구 없소?” 라며 추억의 창을 노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가 많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 실존 인은 아무도 없고 유년 시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혼 속 껌딱지 되어 뛰놀았던 추억거리들이 줄지어 서성이는데 그중에 내 영혼 속의 고향이자 제2의 고향인 연산동 일대의 표정들이 뚜렷이 떠오른다. 지금은 연제구로 편입됐지만, 그 당시 연산동은 동래구라는 거구(巨區)의 중심지였다.
내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거구(巨區)의 모습은 일명 진산동과 풍산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출퇴근길에 통근 열차 편을 거제역을 거쳐 이용해야 하셨던 아버지는 일상생활에 필수 생활용품으로 지닌 채 생활해야 했던 긴 장화를 신고도 온통 진흙탕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 일 수였다. 어디 이뿐이랴 평상시에도 세차게 불던 바람은 동지섣달 겨울철엔 그 기성이 몇 배로 늘어나 그 당시 연산동에는 초등학교가 한 곳도 없었던 터라 5학년 1학기까지 양정 초등학교엘 다녀야 했던 형님은 찬바람이 극성을 부리는 겨울철만 되면 등하굣길엔 풍로에 불을 피우듯이 언 손을 호호 불며 학교를 오가야 했으며 형님의 언 볼을 쓰다듬으며 짠한 마음에 “우짜꼬!~ 돌아! 니, 볼이 거지 궁뎅이 같데이” 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귀가에 쟁쟁한데 형님의 연세 내일모레 이른 고개에 올라서니 세월은 참으로 유수와 같았다는 그 속언이 정답인 것 같다. 그 당시 연산동 땅이 얼마나 질고 바람이 거칠었으면 동네 아저씨들 입질에 오르내렸던 농담 중에 “시방 우리 동네 살라 카머 마누라는 없어도 살지만, 장화하고 귀마개 없으머 못 산다, 아이가.” 그 시절 연산동 일대는 땅이 질고 사계절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했던 터라 비가 잦은 여름엔 가정마다 장화를 챙기는 모습들이 여러 형태로 드러나곤 했으며 겨울만 되면 어디서 몰려오는지 수시로 몰려와서는 그렇지 않아도 시린 가슴을 헤집어 파고드는가 하면 따귀 맞을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현듯 달려들어 싸대기를 후려치기 일쑤라서 잠시라도 바깥출입을 할 때면 귀마개 챙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본디 타고 나기를 꾼의 “끼”를 타고난 데다 유난히 노래를 좋아하고 일상 삼아 사셨던 부모님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는 혼자 노래 듣기를 좋아한 나머지 조금의 틈만 보이면 오디오 스피크가 연결된 컴퓨터로 노래를 즐겨 듣는 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거기 누구 없소?”라며 추억의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영혼의 문을 노크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을 옛 친구를 맞이하듯 반갑게 맞아들여 그들의 지난날 행적들을 글의 마중물로 삼기도 한다.
그들의 행적은 오늘은 또 어디로 데려갈까! 하는 궁금증으로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행적들과 일심동체 한 몸이 되어 추억 행 열차에 오르기 일쑤다.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추억의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은 동심으로 돌아가고 거리 곳곳에서는 고추 친구들과 구슬로 해지는 줄 모르고 구슬로 짤짤이 하던 표정, 보수적인 어른들 흉내를 내려고 만들어진 것인지 몰라도 군대 계급이 그려진 그림 딱지 따먹기로 배꼽시계 우는 줄 모르던 철부지 악동들 표정, 마른 잡초 모아다가 모깃불 피워놓고 제 어미 무릎을 베개 삼아 평상에 누워 밤하늘 우르르 별을 헤아리던 표정, 기나긴 겨울밤에 괜스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해진 가족들의 양말을 꿰매느라 바느질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어머니 졸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입담으로 듣던 표정들이 앞다투어 내 영혼의 문밖에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추억의 행적들은 수십 년 전 부친을 따라 벼 익는 냄새 구수한 가을 볏논으로 단숨에 치달리기도 하고 모친의 등에 업혀 이른 봄 냇가로 마실 갔던 덕에 모진 추위의 그림자가 채 걷히지 않은 수영 강줄기를 타고 내리던 연산동 안 동네 작은 냇가 살얼음을 깨고 해 묶은 이불 빨래하시던 그 추억의 마당으로 달려가 저린 가슴을 더욱 저리게도 했는데 그 추억의 행적들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어머니 이른 봄날 찬거리 없어 유채 꽃잎 따서 김치를 담그시던 그 서른 맛보다는 못했었다.
추수를 앞둔 볏논에는 참새 떼와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고 강철 심장이 곁눈질로 얼핏 봐도 울상 짓는 허수아비 심정은 애처롭기 마련인데 이 애처로운 허수아비 심정을 헤아리셨던 것일까! 반공일 오후만 되면 온 공일에 낚시가실 꿈에 부풀어 아무리 급한 집안일이라 할지라도 네 떡 나 몰라라 하셨던 부친이 참새와 메뚜기 떼와의 소탕 전쟁을 선포한 채 벽장 속에 감춰두었던 엽총을 어깨에 메고 오른편 허리에는 메뚜기를 생포해 담을 두 개의 됫병을 새끼줄로 엮어 차는 한편, 왼편 허리에는 사살한 참새 대가리를 엮어 메달 두 가닥의 긴 새끼줄을 벨트에 묶은 후 누이동생을 호위병으로 거느린 채 보모도 당당하게 격전지였던 지금의 부산시청 일대의 볏논으로 향하곤 하셨다. 그 시절엔 공기도 오염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산동 주민들의 기억 속에 “매연”이란 두 글자의 단어조차 생소했었고 “미세먼지”란 네 글자의 단어는 애당초 들어보질 못했던 덕인지 반나절만 하례한다면 생포된 메뚜기는 됫병으로 두 개에 가득했고 사살된 참새는 두 가닥 새끼줄에 굴비 엮듯 했었다. 여자가 참새고기를 먹으면 말이 많고 수다스러워진다는 속설 탓에 누이동생은 갖은 심부름 다 하며 호위병을 자청하고도 참새고기를 실컷 먹어보지 못하는 사단이 종종 발생하곤 했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지금도 서민층 살림살이는 별 차이 나질 않지만, 그 시절은 중산층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의 90% 이상이 서민층이었던 터라 서민층 살림살이래야 하나같이 도토리 키 재기였다. 그러나 내가 알던 연산2동 서민층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서로 나눌 것은 없어도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슴을 지녔기에 따뜻한 마음만은 언제나 서로 나누며 살았다. 이 중 한 가지 사례를 찾는다면, 동해남부선 열차에 올라 내 부친의 존함만 들먹여도 “강태공”이 아니라 “김태공”으로 통할 정도로 고기 낚는 제주가 남다르셨던 내 부친은 한 달에 두 번 반공일만 되면 퇴근 후 미끼통을 든 채 하천과 논두렁을 두루 다니며 낚시 미끼로 쓰일 지렁이를 채취하여 다음 날 새벽 다래끼를 매고 낚시를 하러 가셨는데 돌아오실 때면 어김없이 낚시한 고기는 다래끼 하나 가득하였다. 낚시해온 고기들을 공동 우물가에 죄다 쏟아놓고 동네 이웃 다 불러내 동네잔치를 벌이셨으니 내 생애 발 벗고 쫓아간들 “내 아버지” 그 따뜻한 천심을 따를 길 있을지 정녕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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