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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수필3부작 고향의 그림자_제1부 영혼속의 내 고향은?

松竹/김철이 2020. 6. 10. 13:20

연작수필3부작 고향의 그림자_제1부 영혼속의 내 고향은?

 

                                                                                                   김철이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 한편에는 고향에 대한 아련함이 묻어있다.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들녘에서 진달래 꽃잎 입에 물고 봄을 희롱하며 살을 에는 겨울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 했던 모습. 성급한 마음에 입었던 옷 죄다 훌렁훌렁 벗어 던진 채 아직은 차게 느껴지는 냇물로 뛰어들어 손가락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민물고기 한 마리 잡아보려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물장구치던 모습, 저만치 물러나 앉은 매미울음 사이로 오곡백과 무르익는 냄새가 절로 묻어나고 하늘과 땅 사이 허공을 타고 붉은 노을빛 자태를 뽐내던 고추잠자리를 쫓아 이리저리 잠자리채 휘두르던 모습, 언 손 호호 불며 서툰 손 제주로 만들어진 썰매에 올라 형이나 누나의 힘으로 눈 언덕을 달리며 호연지기 기르던 모습. 쨍쨍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이 야무지게 얼어붙은 얼음판 위에 둥글게 지구를 닮은 팽이를 팽이 줄로 휘휘 감아 던지며 팽 팽 팽이가 잘 돌아가다가 비틀비틀 거리더니 누워버렸네! 다시 한 번 돌려보자 줄을 감아서 휙 휙 던지니 잘 돌아가는구나. 라는 가사의 동요를 목청이 터져라. 부르며 얼음판을 누비던 고추 친구들의 표정이 바로 코앞에서 노는듯한데 어느새 내 나이 육순(六旬)의 중반에 들어서니 목이 메도록 그리운 건 고향의 그림자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태어난 고향이 갖은 산짐승을 동무 삼아 놀았던 두메산골 초가삼간도 아니고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하루의 커튼을 저치고 내리던 어촌도 아니건만 고향을 향한 추억이 이토록 애잔하게 묻어나는 건 아마도 몸이 성치 못해 마냥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던 유년 시절을 마음껏 뛰놀지 못했던 탓일 듯싶다.

 

 나의 안태고향은 서민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절로 묻어나는 부산 범일동 안창마을이다. 태고향이라고는 하나 내 추억 속에는 안창마을에 관한 기억은 전무후무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년 시절 어머니로부터 적산가옥 다섯 칸 집에서 오순도순 인간미 넘치게 살았던 옛 전설 같은 희로애락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내 나이 두 살 되던 해 늦가을 그 당시 부산 연제구 연산2동 철도관사로 이사를 했다고 하지만 너무 어렸던 탓인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1930년대 초 기와에 목조건물로 지어진 철도관사는 나의 유년 시절 꿈의 원천이자 미래 내가 문학 작가가 되는 데 있어 글밭이 돼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쉰일곱 가구로 지어진 연산2동 철도관사는 부엌을 동, 서로 보게 하여 마치 1920년대 초부터 1968년 초까지 대중교통의 수단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전차처럼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모양새로 부엌문이 서쪽으로 향한 가구는 예, (1호의 1) 부엌문이 동쪽으로 난 가구는 예, (1호의 2) 두 가구 연립 형으로 지어졌다. 우리 가족이 맨 처음 세 들어 이사했던 철도관사의 호수는 기억이 잘 나질 않으나 그 댁 주인아주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그의 동년배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냈고 우리 형님과 초등학교 동기 동창생 누나가 있었으며 내 누이동생과 안방과 건넛방에서 두 달 걸려 태어난 여아가 있었는데 두 가정의 가족들은 마치 한 가정 가족처럼 입속으로 들어가는 밥술까지 꺼내먹을 정도로 친숙하게 생활했었다.

 

 장차 내 문학의 텃밭에 양질의 토양이 될 고향의 추억은 이 시점부터 발하는데 여태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건 외할머니에 관한 기억이다. 아버지께서 철들기 이전에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은 친할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외할머니께 향한 정이 더욱 애틋했는데 외할머니께서 지병인 천식을 오랜 세월 지니고 계셨던 터라 매년 해마다 동짓달 그믐만 되면 해동할 때까지 거의 외부 출입을 금하시고 장작불로 데운 따뜻한 온돌방에서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으시며 겨울을 나시곤 했는데 1956년 병신년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누이동생을 임신하셨던 어머니 해산일이 동짓달 초닷새였던 차라 외할머니께선 어머니 산후조리를 위해 동짓달 중순부터 우리 집에 와계셨는데 동짓달 초닷새 날 누이동생이 태어났고 외할머니께선 어머니의 산후조리를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장애를 지닌 데다 누이동생과 두 살 터울밖에 나지 않던 내게 먼지만 한 불편이라도 줄까 노심초사하시며 등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다. 보름 후 친정어머니의 산후조리를 받기가 송구스러웠던 어머니가 순산한 지 보름 만에 산후자리를 틀고 일어나자 등에 업혔던 내게 철아! 날씨가 따뜻해 지머 니, 업어주러 오꾸마. 그때까지 더 아프지 말고 있거래이 라는 말씀을 남긴 채 외가인 경주로 가셨는데 그 후 그날 들었던 외할머니의 포근한 음성을 내 생애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살아생전 친손자 손녀들이 많았지만, 외손자인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셨던 외할머니 철이 들기 시작하고부터 그 외할머니의 체취가 그리워서 어머니를 졸라 외가를 자주 찾았으나 다시는 외할머니의 체취는 느낄 수가 없었다.

 

 내 추억 속 고향의 향수는 내 나이 세 살 되던 해 부모님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철도관사 16 2로 이사하면서부터 그 향기를 더욱더 짙게 발했다. 이 집으로 이사하면서 시대를 잘못 타고났던 탓에 때로는 영원히 죽지 않은 영혼 속에 한 맺혀 흐르는 어머니의 뜨거운 피눈물을 고사리 손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때로는 많이 배우지 못했던 탓에 부정부패의 시대에 짓밟혀 그 서러움 해소할 길 없어 취중에 늘어놓는 아버지의 넋두리를 들어드려야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 더욱더 애잔한 향수로 다가온다. 그 숱한 추억의 향수 방울 중에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묻어나는 표정들이 있다.

 

 그 당시 연산2동에는 쉰일곱 동의 백열네 가구의 본동 철도관사와 일제강점기 철도합숙 사와 독신자 기숙사로 사용된 바 있고 당시 철도원 중에서 비교적 직급이 낮은 철도원 가족들이 자택으로 생활했던 아파트형 2층 목조건물 네 동이 있었으며 그 2층 건물 네 개 동과 철도관사 본동을 양편에 놓고 가운데 남쪽으로 실개천이 흘렀는데 생활 쓰레기 처리장이 마땅히 없었던 터라 철도관사 본동 주민들 사이에 일명 아파트라 불리었던 2층 건물 내 주민들이 생활폐수는 물론 갖가지 생활 쓰레기를 오랜 습관처럼 무분별하게 실개천에다 버리는 통에 맑은 물이 추억처럼 흘러야 할 실개천은 쉴 새 없이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먼 훗날 그 실개천이 복개되어 연산동과 거제동 일부 주민의 소중한 생계터전으로 변모된다.

 

 한때 이 실개천을 가운데 놓고 국경 없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곤 했는데 갖가지 장난감이 흔치 못했던 시절이라 가깝게는 거제동 멀리는 양정동까지 도보로 걸어가서 집을 짓다 버려둔 폐목재와 폐 못을 주어다 어설픈 손재주로 총과 칼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벌이곤 했다. 지금 이 시대도 빈부의 차이가 동심을 멍들게 하지만, 그 시절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사람 사는 모습은 별다름이 없었기에 철도관사 본동 아이들과 아파트 아이들의 생각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었다. 이 미묘한 감정의 차이 때문에 같은 초등학교 동급생이라 하여도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기가 쉽지가 않았다.

 

 이 철없는 감정들이 불씨가 되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발발하곤 했는데 악동들의 이 꼬마 전정의 무기라곤 나무로 다듬어 만든 총과 칼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구의 두뇌에서 나온 발상인지 몰라도 긴 나무칼은 지휘관의 고유물이 되었고 나무총 끝과 끝에 작은 못을 박아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겨서 솔방울이나 도토리 등을 장착하여 총알 삼아 발사하였으며 새총에 뻣뻣하고 가시가 돋친 청동색의 아주까리 열매를 장착하여 총알 대용으로 사용하는 한편 그 시절 흔하디흔했던 다 태운 연탄 덩어리를 수류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치열했던 꼬마 전쟁 탓에 전투가 터지는 날이면 연산2동 전체는 뽀얀 연탄 수류탄 연기와 연탄재들로 때 아닌 감기·몸살을 앓아야 했고 이를 나무라는 동네 어른들의 고함은 동네 언저리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가 일쑤였다.

 

 이 꼬마 전쟁은 6, 25전쟁이 휴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철부지 어린 나이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동족 간의 전쟁을 직접 체험했거나 집안 어른들 입을 통해 갖가지 전쟁의 실화들을 전해 들었던 탓도 있지만, 마땅한 놀잇감이 없었던 시절이라 어른들이 전해주던 전쟁의 체험담과 호기심들이 복합적인 역할을 하여 순수해야만 할 악동들의 동심을 일깨워 전쟁놀이로 발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추억이라 하여 모름지기 죄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추억도 분명 존재하기에 이 꼬마 전쟁이 원인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 경로를 뒤바꿔놓은 마음 아픈 추억이 길 잃은 고엽처럼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 불행의 주인공은 내 나이보다 한 살 많고 아파트에 살던 형이었는데 한참 전쟁놀이에 정신이 팔려 뛰어다니다 당시 연산초등학교 뒷산 어귀에서 작은 쇠붙이 하나를 주워 철부지 호기심에 바윗돌에 두들겨 보려는 순간, “!” 하는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 폐수류탄 불발사고로 그 형의 인생 경로는 분명, 바꿨을 것인데 그 형은 유년 시절 추억을 어떻게 생각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