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공간

무엇을 살릴 것인가?

松竹/김철이 2020. 6. 12. 09:47

무엇을 살릴 것인가?

 

                                                                     겸손기도 마진우 요셉 신부님

 

귀금속 장신구를 잔뜩 지닌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구조요원이 뛰어들어서 물에 잠겨 들어가는 사람을 수면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급요원은 그의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낸 뒤에 그를 다시 물 속에 잠겨 들도록 버려두고 홀로 물가로 나옵니다. 그리고 건져낸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사람들 앞에 보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구해 내었습니다."

 

무엇을 구한 것일까요? 아니, 무엇을 구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물 밖에서 구조요원을 기다린 사람들은 어떤 것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되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이번 기회에 물에 빠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일찍부터 물 속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란트 하나를 땅에 묻어두고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땅 속에서 달란트는 녹슬어갔고 점점 그 하나 자체로도 쓸모없는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활용을 해야 했고 그것으로 다른 달란트를 벌어 들여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사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라질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기존 교회의 구조와 틀이 아닐까요? 성당의 재정과 인력 충원이 걱정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진정 살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두고 있을까요?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떤 수단들이 보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렇게 다가선다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더 쉽고 빠르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마련한다면 여전히 할 일은 많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껍데기를 쓴 컨텐츠를 양산해 내는 것은 또다른 정보의 쓰레기를 생산해 내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누구나 하는 일상 블로그에 '가톨릭'이라는 이름만 씌운다고 해서 신앙의 빛이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의 컨텐츠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어야 하지 건빵을 주면 고마워하기는 커녕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진정으로 목마른 이에게 시원한 물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연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는 하셨지만 그 모두를 다 빛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응답하게 마련입니다. 숫자는 또한 교회의 재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교회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교회, 나아가 경제력에 연연하지 않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복음의 진정한 빛에 기인하는 모든 시도는 환영받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기에 연연하거나 숫자 늘리기에 혈안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의 목마름에 응답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의 목마름을 읽어내고 그에 필요한 응답을 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장신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려야 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방향으로 응답하게 될 터인데 정작 사람들이 그동안 교회 안에서 복음을 원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